천둥 편: 문제의식과 공공성
키키: 천둥은 학폭 관련 학부모들과 같이 회복적 정의를 공부했다고 했잖아. 어떤 과정을 겪었어?
천둥: 학부모교육으로 회복적 정의를 듣고 감화받은 학부모들이 모여서 학부모 동아리를 만들었어. 회복적 생활교육은 한두 번의 강의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혀야 하는 거거든. 학폭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더라도 학교에서 주목받는 아이들의 부모가 많이 참여했어. 뭔가 아슬아슬한데 집에서는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답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거야.
우리는 갈등을 대하는 태도를 공부하고 ‘회복적 질문’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연습하기도 했어. 어느 정도 훈련이 된 후에는 학교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우리를 초대해서 문제를 풀어간 적도 있었지.
재밌는 건 학부모들이 회복적 정의를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학교 분위기가 바뀌더라. 학교에서 주목받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참여했다고 했잖아. 그 부모들의 태도가 달라지니까 아이들도 달라지고 그 아이들이 달라지니까 교실에서 분위기 흐리는 일도 급격히 주는 거지. 심지어 대화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는 한 아이는 지겨워서라도 다시는 말썽 안 부리겠다고 선언한 적도 있어. 예전처럼 단순히 벌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관리를 하는 게 너무 버거웠던 거야. 하하.
교실 분위기가 좋아지니까 교사들도 학부모들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지. 한번은 수업시간에 교사를 무시하는 몇몇 아이들을 대상으로 대화모임이 열린 적이 있어.
키키: 우와, 교사들이 먼저 학부모들에게 요청했다고? 자신들의 권위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학부모들에게 스스로 밝힌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엄청난 신뢰네.
천둥: 그만큼 학부모들을 안전하게 여긴 거야. 다행히 대화모임은 성공적으로 끝났어. 교사들에게 함부로 말하던 아이들이 완전히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거든.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힘들어한 줄 몰랐대. 그 아이들이 변하자 다른 아이들은 놀라워하는 동시에 어떤 고양감을 느낀 것 같아. 교실에 진짜 평화가 찾아왔지. 그 경험은 우리 학부모들에게 꽤 큰 효능감과 자신감을 주었어. 무엇보다 그토록 원했던 학교 안의 신뢰가 구축되는 느낌이었어.
근데 회복적 정의는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래, 시간을 들여 안전하고 평화적 관계를 만들어가는(피스빌딩) 방식이야. 한번 만들어놓은 문화는 쉽게 무너지지 않고, 또 무너진다고 해도 한번 경험한 피스빌딩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각이 되거든. 하지만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니까 바쁜 선생님들은 차곡차곡 쌓아올려야 하는 정기적인 대화모임을 놓치게 되고, 학부모들도 학교가 알아서 잘하니까 어느새 동아리도 흐지부지되었어.
동아리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피해자나 가해자 부모가 섞일 수 있다는 거였어. 친구들끼리 싸우는 사례가 많은데 학폭위까지 겪고 나면 친구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잖아.
학폭을 겪은 학부모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도 그거야. 이웃이었던 사람들과 다시 못 볼 사이가 되어버리는 거. 이사 가야 하나, 라는 한탄. 결국에는 피해자가 이사 가는 경우가 허다하잖아.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상처가 깊고 치유되기가 힘드니까 차라리 떠나는 거야. 근데 회복적 동아리를 하면서 서로 관계회복이 되는 경우가 많았어. 정말 가슴이 벅찼지.
키키: 회복적 생활교육이라는 교육적 방향을 학교 또는 학부모가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런 성과는 힘들었겠지. 교장공모제 같은 행운이 없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혹시 팁이 있을까?
천둥: 우리가 운영위를 장악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학교가 우리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학교와 교육적 방향을 같이하지 못했더근. 그러다 우리 학부모회가 학교에 정말 필요한 걸 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마음의 문도 열었어. 그게 팁이 될 수도 있겠다.
실은 수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질서가 엉망이었는데, 우리가 ‘학교 순회’를 하겠다고 했어. 학교는 수업시간에 우리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걸 반대했어. 엉망인 수업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겠지. 실제로 그런 꼴을 보면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고.
일단 우리는 건물 밖으로만 돌았어. 강당 뒤나 학교 뒷골목에서 담배 피우는 아이들을 살살 달래고 구슬려서 교실로 들여보내는 일을 한 거야. 학부모폴리스처럼 단속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랑 인간적으로 친해졌어. 점점 아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아는 학부모가 많아지니까 길에서 만나면 서로 반가워하고 담배 피우다 들켜도 도망가기보다 순순히 잡히더라.
무서운 중2들이 어떻게 돌변할지 어떻게 아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사이’가 되면 아이들도 달라져. 익명이 가지는 도발성이 없어진 거지. 점차 학교 밖을 헤매는 아이들이 줄어드니까 학교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
그다음에는 봉사단 활동을 했는데, 말썽쟁이들을 우선 선발했더니 아이들이 너무 열심히 하는 거야. 심심해서 말썽을 부린 거였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근데 다른 학교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학교가 해달라는 걸 돕거나, 아니면 학교를 비판하면서 학부모들이 원하는 걸 요구하거나 둘 중 하나야. 그러면 학교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거리로 여기게 되잖아. 학교 활동을 지원하는 건 학부모들의 자발성이 떨어질 것이고.
키키: 근데 학부모회를 같이 할 사람이 없으면? 사실 학부모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민하는 건 참여율이 너무 낮다는 거거든.
천둥: 그 문제는 정말 답이 없는 것 같아. 하지만 조합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협동조합도 참여율이 40%가 안 된대. 그러니 참여율보다는 나와 문제의식을 함께할 사람을 딱 한 사람이라도 찾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키키: 딱 한 사람? 한 사람과 어떻게 일을 해?
천둥: 그 사람과 충분히 문제의식을 나누고, 그 문제의식이 공공성을 띤다면 분명 또 한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키키: 오호, 문제의식을 나누는 한두 사람의 힘이 결코 작지 않다는 의미네?
천둥: 그래, 맞아! 그렇게 일단 3의 법칙을 이루고 나면 얼마든지 양적인 수를 늘려갈 수 있어. 3의 법칙은 사고실험으로도 증명된 건데, 길에서 두 사람이 어딘가를 가리키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대. 그런데 세 사람이 가리키면 다들 한 번씩 쳐다본다는 거야. 그러니까 세 명만 구하면 어떻게든 시작은 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리고 세 명이 각자 세 명씩을, 또 각자 세 명씩 다단계처럼 늘려가는 거지.
여기서 전제조건은 그 문제의식이 지금 우리 학교에서 중요한 변화의 요소이고 공공성이 담겨야 한다는 거야.
키키: 천둥이 말하는 문제의식은 뭐고, 왜 꼭 공공성이 담겨야 할까? 개인적인 이유로 학부모회를 하면 안 돼?
천둥: 나도 애들한테 재미난 걸 좀 경험해 주고 싶다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시작한 거야. 시작은 그랬지만, 학교에서 학부모의 자리가 뭔지 자꾸 고민하다 보면(바로 그게 문제의식이지), 절로 공공성이 생길 수밖에 없어. 공공성이라는 게 별다른 게 아니고, 개인적인 문제의식을 공적으로 풀어가자는 거야. 교장이 말한 파벌의 문제도 학부모들의 의견을 모아가는 공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으니 내가 아무리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제안하더라도 가닿지 않았던 거잖아.
둘째 초등학교 1학년 때 공개수업 때 일이야.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면서 그래야 부자가 되어서 엄마아빠 좋은 차도 사주고 좋은 집도 살 수 있다고 하는 거야. 나는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 이른바 혁신학교의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1학년 아이들에게, 그것도 공개수업에서 부자가 되라고 하다니. 좋은 차와 좋은 집을 사기 위해 공부를 하라니. 그건 교육적 언어가 아니잖아.
그래서 반모임(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한 반모임이었어)에서 조심스레 그 이야기를 꺼냈는데, 아무도 문제의식이 없더라. 공부의 이유를 부자가 되라는 식으로밖에 설명할 줄 모르는 어른들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어떻게 건강한 사회인 되겠어? 반대로 사적 이익을 위해 의기투합하는 학부모들은 얼마나 많아. 공공성을 놓치는 순간 학교와 교육이 변질되는 건 순식간인 거야.
키키: 정말 생각해 볼 문제다. 그래서 그때 천둥은 어떻게 했어?
천둥: 말했다시피 초등 때는 학부모 활동을 했던 때도 아니어서 많이 서툴렀지. 교장선생님과 만나서 걱정을 늘어놓는 식으로 해결했던 걸로 기억해.
키키: 만일 지금 그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천둥: 지금이라면, 우선 담임을 언급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뭐라고 해도 비난으로 느껴질 테니까. 그보다 ‘우리는 왜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가’로 질문을 바꿔서 토론할 거야. 나는 학부모회가 대안적 질문을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에 딴지를 거는 게 아니라 프레임을 바꿀 수 있는 좋은 질문을 통해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거든. 교복찬반 같은 문제를 ‘학생다움이란 무엇인가’로 바꾼다거나, 체험활동 평가를 ‘체험활동에서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로 바꾸는 식이지.
다시 돌아가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의 이유를 회의록에 남겨서 교사와 공유할 거야. 선생님도 한 번 더 생각할 기회가 될 테니까.
보통은 초등 때의 나처럼 교장선생님이나 교육청에 문제를 제기하는 식으로 해결하는데, 내가 교육청에서 일해보니(학부모지원전문가로 1년 근무) 교장과 교육청은 다 연결되어 있어서 견제가 안 되더라. 교육청에 말해봤자 교장에게 귀띔하고 교장에게 말해봤자 담임에게 귀띔하고. 그 말인즉슨 서로 면피하기 급급하다는 말이야. 실제로 이런 문제로 분노하는 학부모들이 많잖아.
키키: 맞아. 기껏 교육청에 신고했더니 교장이 전화를 해서 민원 취소를 요청한 적도 있어. 그럴 때 학부모들은 믿을 데가 없다고 느끼지.
천둥: 예전에 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인데, 급식에서 애벌레가 나왔대. 아이가 엄마에게 말했고, 엄마는 교육청에 전화했지. 교육청은 일이 커질까 봐 학교를 질책했고, 학교는 당장 급식 선생님을 쫓아냈어.
사실 그 학부모는 아이가 굉장히 놀랐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라고 물어보고 싶었을지도 몰라. 급식 과정을 견학하게 해주고 불안을 해소시켜주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었어. 알고 보면, 친환경 상추에서 나온 애벌레일지도 모르고, 아이들이 친환경 급식에 대한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겠지.
키키: 학폭에서 학부모들이 느낀 거랑 일맥상통하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상황을 설명하거나 불안을 해소해주면 되는 간단한 문제를 민원으로 처리하는 것이.
천둥: 당황스럽다는 지점에서는 비슷하지. 학교와 학부모는 왜 그리 주파수가 안 맞는 건지. 서로 원하는 것이 뭔지 질문을 잘 던졌으면 좋겠어. 정말 이 문제로 단단히 화가 나서 고소 고발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과정을 정확히 알고 싶은 건지, 또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지.
가끔 민원으로 인한 뉴스를 보면 저 사람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어떤 감정이 쌓이고 쌓여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그만큼 우리의 목소리가 교육 현장에 가닿지 않기 때문이잖아.
키키: 얼마 전 뉴스에 나온 피자 가게 사장도 그랬잖아. 본사에서 인테리어 바꾸라고 해서 칼부림이 일어났다면서. 그 사장님 그럴 분 아닌데, 하는 증언들도 있더라. 물론, 그런 행동은 문제가 있고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 이전에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한번 살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천둥: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되게 많은 것 같아. 물론 정말 고약한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 그런 사람은 어디나 한두 명은 있어. 학부모든 교육계든 어디든.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불안한 거야. 불안이 쌓이면서 화가 되고, 그 화가 해결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터져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 불안을 조금만 해소시켜주면 될 일이 너무 커지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 내가 학폭위원으로 있을 때 길을 못 찾고 물어볼 데도 없이 깜깜했던 것처럼 학부모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 찾아갈 곳이 있다면 민원도 대폭 줄지 않을까? 나는 학부모회에서 그게 해소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