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메모 안 할래요?

글쓰기의 좋은 습관

by 이지니

이래도 메모 안 할래요?






"그날이 언제인지 혹시 메모했니?"





H 언니는 나의 18년 지기입니다. 내 나이 스무 살, 처음 언니를 만나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니는 베테랑 가이드처럼 능숙하게 나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피곤한 내색 없이 말이죠. 5년 전에는 함께 미국 시애틀과 캐나다 밴쿠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마터면 절교를 선언(?!) 할 지경까지 닿았지만, 우리가 그깟 일로 끝날 사이였다면 시작도 안 했을 테지요. 다행히 그 이후로 어떠한 끈끈이로도 대적할 수 없을 만큼 돈독해졌습니다.


누구에게 쉽게 말 못할 비밀을 서로 공유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어서도 함께할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4년 전, 언니는 미국에 사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가족처럼 친한 사이라 언니의 결혼에 마냥 웃고 축하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보고 싶어 그리울 게 뻔하니까요. 얼굴을 맞대고 수다를 떨고 싶은 H 언니. 벌써 4년이 흘렀습니다. 시대가 좋아 영상 통화든 카톡 메시지든 자주 주고받곤 하지만, 그래도 살결을 맞대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며칠 전, 언니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지니야, 내가 2016년 미국에서 예식을 올렸을 때가 언제지? ^^;; 혹시 메모해 둔 것 있어?"


나와 친한 지인들은 잘 압니다. 내가 메모광이란 사실을요. 문뜩 떠오른 아이디어부터 어젯밤에 꾼 꿈, 버킷리스트, 있었던 일, 그날의 감정 등을 적습니다. 그래서인지 언니는 가장 먼저 내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나는 바로 9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메모 앱을 열고 2016년 카테고리를 열었습니다. 검색창에 'OO 언니 결혼'을 적으니, 나왔습니다. 아무리 이것저것 적는다고 해도 언니의 미국 결혼식 날짜가 있을까 했는데... 있었네요. 나는 마치 산삼 한 뿌리 캐낸 사람처럼 크게 "아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내용을 캡처해 언니에게 보냈습니다.


"와, 대박! 역시 지니는 대단해!"


메모 하나 잘 적어둔 덕분에 또 한 번 칭찬 세례를 맞으니 뿌듯합니다.









"타임머신이 타고 싶을 때"




메모를 시작한 건 2011년 가을부터입니다. 중국에 있을 때였는데, 한국에 가면 그리울 것 같아서 하루하루를 적었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줄의 짧은 글이었습니다. '글'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정도였죠. 한해 한해 적다 보니 벌써 9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모은 글의 개수가 800여 개가 됩니다. 9년의 시간으로 보면 많은 양은 아니지만 머리부터 발끝으로 전해지는 뿌듯함은 감출 길이 없네요. (TMI : 또 다른 메모장에는 300여 개 넘네요)


가끔 잠이 안 와 뒤척일 때 메모장을 엽니다. 그리곤 나만의 타임머신에 탑승하죠. 1년 전 오늘, 5년 전 오늘이 궁금해 그날의 메모를 부릅니다. 마치 바닷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보물 상자를 여는 것처럼 두근거립니다. 과거의 나를 만나는 시간. 누구보다 진지했고, 서글펐으며, 행복했는지가 글 안에 녹아 있습니다. 그때는 뭐가 그리 간절했는지요. 무엇보다 하고 싶은 건 왜 이렇게 많았는지요. 불행 중 다행인 건 도중에 포기하거나 실패할지라도 실행했다는 겁니다. 그래, 이 시간들을 건넜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겠죠.


뒷장에 적힌 버킷리스트를 봤습니다. 책 출간, 북 콘서트, 라디오 출연이라고 적혀 있네요. 세상에! 이미 다 이뤘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반쪽 만나기'가 이뤄졌습니다. 동갑내기 친구들보다 결혼이 늦어져 마음 한편에 초조함과 조급함이 숨 쉬고 있었거든요. 결혼이 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인생의 동반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생기길 바랐습니다. 지금은 그 벗과 매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메모는 글쓰기의 좋은 습관입니다"




오늘이 더욱 감사한 건, 메모 덕분입니다. 적지 않았다면 내 기억에서 영영 사라졌을 시간들, 아무리 기억을 닦아도 흐릿함으로 남을 뻔했는데 말이죠. 앞으로도 메모 습관은 계속될 것입니다. 9년이 넘은 터라 이제는 몸에 붙은 머리카락처럼 삶의 일부가 된지 오래입니다. 이것 또한 감사합니다.


메모의 장점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입니다.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메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행위죠. 특히 글감을 찾을 때, 애써 머리 굴리지 않아도 메모장만 열면 수두룩합니다. 실제로 내 책 <꽂히는 글쓰기의 잔기술>의 내용 대부분은 메모장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엉덩이가 무거울수록 글을 잘 쓴다는 말도 맞고, 평소 메모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 역시 글쓰기에 수월합니다.


지하철 안에서, 화장실 안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친구를 기다리면서, 잠들기 전에, 일어나자마자... 메모할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입니다. 단 한두 줄을 써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알고 싶은 비밀 일기장도 좋습니다. 일단 메모부터 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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