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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May 23. 2022

초록의 풍경

서울 영등포구 | 선유도

 근 1-2년은 놀랍도록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어지러운 세월의 풍파를 피할 길 없이 그대로 맞으며 지독하게도 버텨왔다.  

내가 보는 나 외의 세상은 태풍의 눈 같았지만 나의 세상은 태풍의 위험 반원과도 같았다.


 이번 해만큼은 그간 미뤄왔던 일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이었지만 현재는 잘하지 못했던 것, 또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기로 마음을 먹어본다. 가장 처음 떠오른 건 걷기였고, 그다음은 사진, 그다음은 여행, 그다음은 좋아하는 공간(이를테면 서점, 박물관, 미술관)에 가는 것이었다.


 직업상 늘 모든 감각과 감정은 예민했고, 생각은 늘 많았지만 떠오르는 그 생각을 잊어버려야만 했다. 이럴 때 나는 오랜 벗인 단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메고 꽤 오랜 시간을 걸어 서점을 갔다. 서점으로 가는 길에 심어진 가로수, 낙엽 밟는 느낌, 발걸음을 빠르게도 느리게도 만들어주는 여러 악기의 소리를 전달하는 두 귀에 꽂힌 이어폰은 괜스레 삶의 이유에 대해 생각 드는 냉기 가득한 하루를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어주었다. 한껏 나아진 기분으로 맞이하는 서점은 책 냄새, 책의 질감,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소재, 평온한 사람들의 표정, 울음을 억지로 삼켜내 시커멓게 타버린 재와 같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얼굴을 본 적 없는 이들의 따뜻한 위안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내가 진심으로 느끼고 싶었던 '온기'로 다가왔다. 서점을 나서는 발걸음에는 늘 온기가 가득했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온기를 담아 나의 시선을 56mm 렌즈에 담아보곤 한다.

 긴 겨울을 지나 시리던 바람이 제법 따뜻해진 3월의 어느 날.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카메라를 꺼내 밖으로 나서본다. 나의 계절은 아직 흐르는 한강도 얼게 하는 1월의 한 겨울이었지만 바깥세상은 얼었던 땅이 녹아 새순이 자라고 있었고, 태양빛 아래 앉아 있으면 제법 따스했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버스를 타고 소소하게 서울 여행을 하다 보니 선유도에 도착했다. 강바람이 유난히 많이 부는 곳이었음에도 꽃과 나무는 나보다 먼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이어폰에는 좋아하는 이소라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손에는 좋아하는 카메라가 들려있고, 발에는 오랫동안 걸어도 발의 피로를 잊게 해 줄 만큼 편한 운동화가 신겨져 있으니 시선이 닿는 모든 곳마다 싱그러웠고, 여유가 느껴졌다.


 이날의 선유도는 사랑하는 가족, 연인의 손을 잡고 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겨우내 가장 가까이 지내던 이불을 벗어던진 사람들의 손에는 피크닉 매트, 카메라, 비눗방울, 연 등이 그것을 대신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소중한 오늘의 기억을 더 특별히 만들어 줄 아이템들이었다.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는 어린아이의 미소를 보며 '먼 훗날 3월을 기억할 때 이날이 떠올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어느 멋진 날을 경험하고 있었다.

 시간이 더 흘러 따사로운 태양빛이 작열하는 태양빛으로 변하는 시기가 되면 이곳 선유도는 더욱 초록의 풍경이 될 것이다. 아끼는 책 한 권을 들고 가볍게 떠나, 피크닉 매트에 누워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골라온 책을 보는 여유로운 일상을 꼭 느껴보기를. 눈을 감고 휘감아 돌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껴보기를.


 진짜 초록의 풍경은 내가 느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껴진다.

그때 만나는 황홀한 '진짜 초록의 풍경'을 맘껏 즐겨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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