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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Jun 09. 2022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전남 목포  |   목포 해상케이블카 & 유달유원지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조금씩 내 취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간 여행도 산보다는 강이 우선이었고, 강보다는 바다를 보러 가는 여행이 가장 좋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트래킹을 하고, 산을 보고 싶어 산에 맞춰 여행 일정을 짜는 게 느껴진다. 산을 타는 속도는 느리지만 제법 꾸준히 올라간다. 산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몇 해 되지 않았다. 아마 녹음이 우거진 곳을 다닌 뒤로 마음의 병의 경과가 좋아진 뒤부터이기에.


 이번 여행도 '유달산'이 중심이었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유달산에서 내려다보는 다도해의 전망이 예뻐 보여 꼭 가고 싶었다. 목포 여행의 꽃은 해상 케이블카라고 했다. 이 꽃의 향기는 꼭 맡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이른 점심을 먹고 도착한 케이블카 북항 승강장은 입구부터 만석이었고, 발권을 위해 들어간 매표소는 마치 명절 전 고향 가는 표를 사기 위해 줄지어 늘어섰던 귀성객들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발권을 마치고 탑승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권한 탑승권에는 대기 번호가 나와있다. 5,326. 전광판에는 아직 3,710번대가 불리고 있다. 예상 대기시간은 120분, 앞으로 1,600번대를 더 지나야 5,326이라는 탑승 번호가 호출될 예정이었고, 기다리는 게 맞는 건지 발권을 하고도 고민을 끝없이 했다. 기다리는 동안 마실 커피를 사러 카페를 갔지만 그마저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미 마감을 했다고 한다.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한 여행이었는데 일이 잘 안 풀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미 모든 의자, 웬만한 바닥은 사람들이 앉아 있어 실내에는 더 있을 수가 없어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잠시 잠잠했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한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은근하게 거슬리는 정도로 비가 온다. '두 시간 동안 뭘 하는 게 좋을까.' 고민을 해도 크게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럴 때 동행하는 이가 없어 말동무가 없는 지금이 외롭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는 게 아닌지, 꼭 기다려야 하는 건지 불평 섞인 볼멘소리를 듣지 않아 편안하다는 이중적인 생각이 번갈아 든다. 아마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하는 현실을 그때까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기다려본다.

 기다림에는 늘 따라오는 지루함을 이기려고 일부러 빠른 템포의 음악을 듣지만 음악도 지루해 괜히 재생 속도가 느리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질 때 즈음,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나고 전광판에 5,326 번호가 불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곳에도 대기줄이 끝을 모르고 서 있다. 대기줄은 여러 대의 붉은 케이블카가 지난 후에야 줄어드는 게 실감 날 정도였고, 그렇게 40여 분이 지나서야 붉은 케이블카를 겨우 탈 수 있었다.


 케이블카 창문 너머로는 째지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두둑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빗소리는 낭만적이었지만 창문에 서린 습기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보고 싶었던 풍경이 가려지고 회색의 하늘과 회색의 바다 위를 지나가는 쨍한 붉은 케이블카만 보인다. 원 목적지인 유달산 스테이션과 가까워질수록 바람 소리와 빗줄기는 더 거세졌고 운무는 더 짙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내릴지, 그대로 고하도 스테이션까지 갈지. 날이 좋을 때 다시 와서 제대로 보자는 결론을 내린다. 아쉬운 마음에 선명히 보이지도 않는 유달산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담아본다. 날씨가 좋았다면 카메라를 들었을 거다.

 고하도 스테이션에 도착해 전망대로 가는 길에 들어서자 바짓단을 신경 써야 할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진다. 고하도는 바다 위로 설치된 데크를 따라 산책을 하는 게 여행의 묘미이지만 그칠 줄 모르고 떨어지는 빗줄기는 많은 걸 포기하게 만들었다. 너무 금방 돌아가고 싶지 않아 천천히 비 냄새, 나무 냄새를 맡았고, 우산 위로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걸었다.


 거세지는 빗줄기에도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번지며 이 순간을 즐거이 만끽하는 한 가족이 반대편에서 걸어온다. 유쾌한 가족을 보며 젖을까 노심초사하며 앞으로 맨 배낭, 젖어오는 바지 밑단, 습기에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 우산 아래 드러난 팔에 젖어버린 셔츠의 불쾌함을 잊고 여행의 순간을 느껴본다.

 다시 북항 승강장으로 돌아와 아쉬운 마음에 뷰파인더 안에 유달산을 담아본다. 아래에서 봐도 멋진 산이었다. 날이 좋으면 다시 찾아오겠노라 새기고 마지막 여행지인 '유달 유원지'를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8분 뒤에 온다니 시간도 여유 있어 헤드폰을 에어팟으로 바꾸기 위해 배낭에 손을 넣어 에어팟을 꺼내고 미리 탑승 준비를 하기 위해 교통카드를 꺼내려고 하는데,


 맙소사. 카드 지갑이 없어졌다. 주머니, 가방, 파우치, 심지어 카드가 들어갈 수도 없는 크기의 물티슈 덮개까지 열어봤지만 어디에도 없다. 배낭 안에 있던 짐을 다 꺼내 버스 정류장 벤치에 늘어놓았다. 없다. 순간 머리가 아득해지며 여행을 여기서 마치고 기차역으로 일단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타야 할 버스가 지나간다. 분실할 수 있으니 지갑을 나눠 현금용 지갑을 챙겨간 게 생각이 나 약간의 안도감이 든다. 이번 여행지는 왜 오롯이 여행의 설렘을 느끼지 못하게 할까 개탄스러웠다. 속상한 마음에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했지만 바쁜 일이 있는지 받지 않았다. 한숨이 나온다. 일단 어질러놓은 짐을 챙겨 배낭에 넣으려 바닥을 펴는데 바닥 보강재 아래로 뭔가가 만져진다. 익숙한 두께감과 표면의 촉감. 카드 지갑이었다. 짧은 안도감 뒤로, 내 실수로 잃어버린 물건을 그날의 운이 나빠서라고 '탓'을 하며 책임을 돌려버리려 했던 내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든다.

 가방을 정리하고 마음도 정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달 유원지로 가는 버스가 도착해 카드를 태그하고 빈 의자에 앉았다. 유달 유원지에 도착해서야 제대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경관이 빼어난 바다는 아니지만 이곳만의 소소한 멋이 있는 곳이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아마 이곳에서 저녁 시간까지 앉아 카메라로 주변 촬영도 하고, 아침에 산 유명 제과점의 바게트도 저녁으로 먹으며 목포대교를 배경으로 떨어지는 해를 보며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봤을 것이다. 여행자의 아쉬운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야속하게도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짧은 모랫길을 걸으며 부드럽게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를 바라본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요란한 빗소리가 없었다면 시간 가는  모르고 멍하니 쳐다봤을지도 모른다. ''라는  감정의 쏘시개 같은 존재 같아 감정을 보다 풍부하게 느끼게  준다.  생생히 느껴지는 감정의 단어들은 어느새  마음을 종이 삼아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처음 떠날 때만 해도 이날의 하늘처럼 비구름이 가득했던 의문 투성이의 여행은 어느새 각기 다른 색들의 방호벽처럼 각기 다른 장소. 각기 다른 기억에 저마다의 색이 입혀진다. 이번 역시 잘 떠나 왔다. 비록 예기치 않은 상황을 곳곳에서 만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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