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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길의 애정 May 25. 2022

여명이 드리우는 차창 밖을 볼 때면

전남 여수 |  새벽 기차 여행의 색(色)

 AM 05:10. 내 평생 가장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기차 시간이다.


 용산역에서 여수엑스포역까지 가는 05:10 KTX를 타기 위해 용산역까지 적어도 05:00까지 도착해야 했고, 새벽 시간이라 택시가 잡히지 않을 것을 감안하면 04:30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했다. 씻고, 옷을 챙겨 입고, 한 번 더 짐을 맞게 쌌는지 점검도 해야 하기에 적어도 03:00에는 일어나야 했다. '잠을 자고 갈 수 있을까'. '회사가 용산역 앞이니 미리 짐을 싸서 회사에서 하루 자고 갈까.' 무수히 많은 고민 끝에 조금 이른 시간부터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 보기로 했다. 자기 전까지 했던 모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금방 곤히 잘 잤고, 심지어 3시간 남짓 잤음에도 컨디션도 매우 좋았다. 택시도 바로 왔다. 이제 승차만 하면 가장 큰 산을 넘는다.

 내가 탈 칸과 자리를 찾아간다. 이른 시간의 기차지만 꽤 많은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3호차 4A 1인석. 용산역에서 여수까지는 기차로도 세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이기에 시간에 지치면 안 됐다. 테이블 위에는 아이패드, 헤드폰, 충전기, KTX 매거진을 올려두었고, 특실 제공 서비스인 생수와 간식을 챙겨 왔다. 시야를 많이 가리지 않을 정도로 모자를 눌러쓰고 배낭을 선반 위에 올려뒀다.

  가끔 여행이 하고 싶을 때 KTX 매거진이 생각난다.  이 매거진이 보고 싶어 기차를 타고 싶은 날도 있다. www.ktxmagazine.kr로 접속하면 온라인으로도 쉽게 발행된 매거진을 볼 수 있지만 풍경을 뒤로하며 달리는 기차에서 종이를 넘기며 읽는 매거진은 태블릿으로 볼 때보다 여행의 설렘을 훨씬 증폭시킨다. 다음 장을 기대하는 맛이 있다랄까. '다음은 이곳을 가볼 테야.'라며 다음 여행지를 메모해두는 일은 새로운 상상을 하게 만들어준다. 22년 5월 호의 메인은 익산이었다. 익산의 글을 읽으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답사에는 초급, 중급, 고급이 있는데, 초급은 입장료를 받는 큰 절을 가는 것, 중급은 입장료는 없지만 고즈넉한 절을 가는 것, 고급은 절도 중도 없는 폐사지를 가는 것이라 했다.


 폐사지에 서면 누군가는 빈 공터를 보며 볼 게 없다며 발걸음을 돌리겠지만, 나는 빈 공간에 건축물을 세우고, 탑을 세우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배치한다. 일주문을 지나 보이는 대웅전 처마에는 맑은 바람 소리가 담긴 풍경을 달아주고, 외벽에는 각기 다르게 그려진 탱화를, 대웅전에는 목탁 소리와 염불을 외는 스님들을, 향을 피울 수 있는 공간은 한편에 따로 마련해주는 등 꽤나 자세하게 심상을 그려본다. 방문해봤던 익산은 심상을 가득 채워볼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도시다.

- 가을, 익산

이렇게 메모장이 한 장 또 채워졌다.

 매거진을 보다 보니 어느덧 창밖이 가을날의 산처럼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둑과 논에 잠긴 물에 반영된 주황의 하늘빛은 박명(薄明)과 대비되는 하늘빛이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어느새 가득히 떠오른 해는 높이 세워진 아파트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하며 애를 태웠다. 이루 설명하기 어려운 벅참을 눈으로만 담아내기 아쉬워 서둘러 휴대전화로 영상을 촬영한다.


 오늘의 풍경은 오늘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잠을 자면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이동 수단을 탈 때 잠을 잘 자지 않는다. 이른 기상을 핑계 삼아 기차에 탑승해 자리에 앉을 때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려면 자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유혹에 넘어갔다면 내가 본 풍경은 영원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여행의 묘미는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맞이하는 놀라운 아름다움이지 않을까.




- 여행 계획 수립 : 여수 1편 바로가기 클릭

- 수수한 여수 섬 여행 : 여수 3편 바로가기 클릭

- 언덕 위 절경 : 여수 4편 바로가기 클릭

- 소소한 도보 여행 : 여수 5편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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