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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Sep 03. 2023

그녀는 어둠의 숲처럼 고요했다.

영혼의 종족-8.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진실이다.'- 지옥의 루시퍼.



 19.

 9월이 되었다. 지난여름은  언론에서 호들갑 떨 정도로 뜨거웠고, 헤림에서 브리지트로 돌아온 그녀는 더 뜨겁게 보냈다.

 "도대체 혜림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옷들을 어떻게 입고 살았을까?"

 브리지트가 행거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정장풍의 옷들을 낚아채듯 거둬들이며 혼잣말했다. 볼 때마다 신경 거슬렀다. 그녀가 옷을 안고 방에서 나오자 로운도 한가득 안아 들고 자신의 방에서 나왔다. 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하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빈손으로 돌아온 그녀들은 다시 한가득 안아 들고 나갔다. 들락날락하며 가방, 신발, 책 그리고 소지품도 슬며시 버려졌다. 그녀들이 버린 것은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이다. 여자는 이래야 하고, 사람은 그래야 한다는 기괴한 규칙은 죽은 자들이 뱉어낸 생기 없는 잿빛 도덕률처럼 수천 년간 허공을 떠돌고 대지에 가라앉아 두텁게 쌓여있다. 직장, 학교, 장례식, 결혼식 등 장소에 걸맞은 옷을 입어야 한다. 이곳 세상은 옷 입는 사소한 행위조차 시시콜콜 간섭했다. 워낙 평범한 일이다 보니, 그것이 가스라이팅 범죄란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래서 좋은 사람, 단정한 사람, 예의 바른 사람으로 보이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그들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주목받길 원하지만, 현실은 감독관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엑스트라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다 그녀는 그동안 기억 속에서 멀어져 있던 것을 발견했다. 재활용 수거함, 쓰레기봉투, 폐지 보관대 그 어디로도 처리할 곳이 마땅치 않은 종이 통장이다. 드문드문 생각났으나 곧장 잊어버리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린과 브리지트,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을 보다 견고하게 만들어 줄 돈과 관련된, 절대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한 대화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모든 남자가 금융 전문가처럼 말하고 부동산 투자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지만 아쉽게도 그는 예외였다.

 세상의 모든 여자는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현명하다. 솔깃한 숫자 이야기에 넘어간 여자들은 그 남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금방 알아챈다. 어느 일정한 시점이 되면 '아, 이 남자는 정말 아니구나' 하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그때부터 여자는 무감각해지고 냉소적으로 변한다.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의 발걸음은 한없이 느려지고, 고개는 숙여지고, 어깨는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지탱할 수 없는 듯 처져있다. 여자는 인생에 중요한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불행을 남자와 연결 짓는다. 어쨌든 그런 가당치 않은 헛소리만 주절거리는 꼴 보기 싫은 남자와 계속 산다는 것은 절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때론, 그 지겨운 관계를 정리하고 또 다른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와 만나기도 한다.

 카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했다. 너무나 유치찬란해서 눈 뜨고 못 볼 정도였다. 그가 쓴 자작 시의 구절처럼 말이다.


                 수풀에 누워 바람을 보고 별을 듣고 나무와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듯 그는 무거운 잿빛 언어로 말하지 않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에 존재하기 훨씬 이전의 언어인 바람의 언어로 속삭였다. 당연히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들은 알아들을 수 없다. 나와 너로 시작된 대화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 사람과 우주를 넘나들었고, 밤이 되어 한 침대로 들어가면 촉감으로 이어졌다. 서로의 숨결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릴 때면 꿈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우리의 꿈.

 식탁으로 옮겨 앉아 브리지트는 짜증을 참기 힘든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녀의 손에는 전 재산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통장이 들려있었다. 통장에 인쇄된 숫자가 주는 불편함이었다. 마주 보고 앉은 로운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고 그녀를 관찰했다.

"있잖아, 나 남은 돈 있어."

 카린이 따뜻한 레몬차를 그녀와 로운 앞에 차례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영락없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내아이의 말투였다. 그 용감한 사내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뭐든 다 내어줄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로운은 그의 엉성한 말투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이 카린의 매력이기도 했다. 깊은 생각 끝에 나온 엉성함.

 '남은 돈?'

 브리지트는 갸우뚱하며 말의 의미를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젖히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돈에 대한 통쾌한 정의였다. 그에게는 힘들게 벌어 모아 놓은 돈이 아니라 쓰고 남은 돈일 뿐이다. 좀 더 해석하자면, 내게 돈이 있으니 우리 함께 쓰자는 뜻이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양팔로 그의 목을 끌어당겨 안으며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카린, 자기는 정말 멋진 소년이야."

 로운은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눈꼴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토했다.

 하긴 그깟 흔해 빠진 돈 이야기를 진지한 말투로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모은다는 개념이 희박한 카린의 입장에선 '모아 놓은 돈'이 아닌 '남은 돈'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에게 돈이란 늘려가야 할 증식 수단이 아닌 물물교환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는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자 가장 위험하고 역겨운 물질인 화폐를 순수 목적 그대로 사용했다.

 번거로운 것을 딱 질색하는 성격인 그는 복잡한 것들을 단순화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그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직불 카드는 누구나 쓸 수 있게끔 지갑이 아닌 거실 협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는 필요하면 사고 굳이 필요 없으면 사지 않았다. 간결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다.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 사고, 단백질 음료 없이 방에서 바벨 하나로 운동하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매달 공과금을 납부하고, 가끔 근처 고깃집에 가는 것을 일일이 따져가며 산다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이다. 그는 크게 벌어본 적도 없지만 많이 써본 적도 없다. 물론, 그녀와 함께 지낸 후로 지출이 약간 증가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인터넷으로 그녀의 몇만 원짜리 옷을 서너 번 결제했고(사실 이 부분도 로운이 알아서 했다), 사랑을 나눌 적당한 장소인 모텔비가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성인 남녀가 함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불가피한 소비였다. 낭비와 절약, 상반된 의미를 지닌 두 행위의 공통점은 불안한 사람들이나 하는 강박장애란 것이다.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감이 몰려와 습관적으로 손톱을 물어뜯는 것과 같다.



 브리지트가 외출 채비를 했다. 그녀는 옷을 입고 전신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돌아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가슴부터 허리선까지 몸 선이 드러나게 딱 달라붙은 검은색 원피스는 치맛단이 넓게 퍼져 발목까지 내려왔다. 머리 스타일은 언제나 그렇듯 제멋대로 꾸몄다. 얼기설기 헝클어지게 땋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머리를 연보랏빛 리시안서스꽃들로 마무리했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카린과 로운에게 인사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일 층 현관문 밖으로 나오자 한풀 꺾인 더위 틈새로 강렬한 오후의 햇살이 화장기 없는 캐러멜 톤 얼굴로 내리쬐었다. 잠깐 허공을 올려다보고 눈이 부신 듯 깜박거렸다. 그녀는 어깨에 걸친 검정 숄더백에서 검정 뿔테 선글라스를 꺼내 끼는 것으로 일렁이는 새까만 눈동자를 가렸다. 그러고는 가슴속에서 울리는 기분 좋은 리듬에 맞춰 걸어갔다.


 "살아있는 향기... 발칙한 걸음걸이... 기묘한 눈빛.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그때 그대로야. 종말을 부르는 지옥의 브리지트."

 대형 교회 잿빛 첨탑 위, 보이지 않는 형체가 그녀를 멀리서 내려다보며 절망에 차 있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그녀가 나온 건물을 쳐다봤다. 카린 또 한 거실 창가에서 첨탑을 주시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형체가 움찔거리더니 사라졌다.



 그녀가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도로 건너편 극우 정당 현수막에 '화합과 통합'이란 글자가 보였다.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간결한 문구에서 전체주의적 색채가 짓게 느껴졌다. 그 누구도 반박하기 힘든 완벽한 언어였다. 그들의 뻔한 속셈이 드러났다. 지나간 과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뜻이다. 어디 그뿐일까. 이 세상엔 희망, 자유, 영혼, 평화, 행복, 사랑 등 빈틈없이 완벽한 언어들이 호객행위를 하듯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 모두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인간은 언제나 삐뚤어진 선택을 하고 완벽한 삶을 꿈꾼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그녀는 횡단보도를 건너 얼마쯤 걷다가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귀에 에어팟이 꼽고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다. 나란히 서서 각자의 스마트 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 여자는 남자가 아닌 스마트 폰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작은 기계는 참으로 영악했다. 믿음과 천재성을 주는 척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생각을 훔쳐 갔다. 그리고 종류별로 나누고 쪼개는 분류 과정을 거쳐 플랫폼 기업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했다. 생각을 빼앗겨 무지해진 사람들은 들어야 할 것은 듣지 못하고 봐야 할 것은 보지 않는다. 그들은 소셜미디어라는 연출된 가상의 공간에서 길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기웃거린다. 그러면서 점점 더 그 작은 기계에 의지한다.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손가락을 능숙하게 놀리며 뭔가를 계속 찾아 헤맨다. 옷 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과 행동까지 일일이 묻고 허락받는다. 하지만 시키는 데로 따라 하고 흉내 내 봐도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힘주어 말하지만 본인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동질감을 느끼기보다는 적잖게 실망한다. 섬찟하게도 화합과 통합은 이미 이루어졌다. 언젠가 사람들이 스마트하게 멍청해져 더는 빼앗을 생각이 없어지게 된다면, 인간의 뇌에 칩을 심어 업그레이드시키는 날도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후각까지 통제할 만큼 영악하진 않았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초록의 향이 촉수처럼 뻗어 내려갔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틀에 박힌 향수 냄새와 달랐다. 거친 듯하면서도 자연스러웠고 화려한 듯 하지만 고결하게 느껴졌다. 코끝으로 스며든 기묘한 향기에 사람들은 바로 반응했다. 아주 옛날, 고대 통제 불가능한 주술에 사로잡힌 듯 손에 든 작은 기계에서 벗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맡아진 향기처럼 전혀 규칙적이지 않은 여자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검은 원피스, 검은 선글라스, 캐러멜 톤 피부, 붉은 기운이 감도는 머리칼을 헝클어지게 땋은 여자였다. 머리에 달린 크고 작은 연보랏빛 꽃들은 어둠을 양분 삼아 피어난 듯 고요했다. 그녀가 어둠의 양탄자(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사람들이 힐긋거렸다. 하지만 브리지트는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시끄러운 시선을 선글라스 아래 가느다란 입꼬리 미소로 가볍게 튕겨냈다. 마치 비웃는 듯했다.

 대합실로 내려온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기둥에 걸려있는 TV를 응시했다. 국내 정유사들이 사상 최대의 수익을 냈기에 1,500%의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지구 반대편 우두머리 짐승이 힘없는 이웃 나라를 침략해서 일어난 전쟁으로 전 세계 오일 가격이 급등했다. 그 나라에선 그 우두머리 짐승을 용감한 왕처럼 칭송한다. 하지만 용감한 짐승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짐승은 하나같이 비열하다.

 카메라가 올림픽 메달리스트처럼 근사한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정유사 직원들을 비췄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그들은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룬 듯 자부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취재하는 기자 또한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브리지트는 창세기에 나온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떠올렸다. 물론, 사실과 동떨어진 꾸며낸 이야기다. 청동기시대 사해 지역에 운석의 폭발로 인해 염호가 말라버려 작물이 자라지 못하는 소금밭이 된 것뿐이다. 그들은 살육, 폭력, 강간이 난무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같은 종족의 피 묻은 전리품만큼은 확실히 챙겼다. 그리고 파티를 벌였다.

 '소돔과 고모라인들의 막장 파티....'

 3,7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류는 변한 것이 없었다. 저 지경까지 갔다면 볼 장 다 본 사회였다.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거대 조식에선 부끄러움 마저 1/n로 희석되고 그 조직원들은 쓰다 버려질 1/n 부품 정도로 하찮게 취급된다. 어느 날 기업 실적이 악화하여 권고사직을 당한다고 해도 억울하다고 호소하면 안 된다. 본인들이 믿고 떠받드는 시장경제 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쓰다 버려질 물질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정말 억울해할 사람들은 살육, 강간, 폭력, 굶주림 등 전쟁이란 공포에 짓눌려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선글라스 안에 있는 그녀의 눈빛은 매우 고요했다. 이곳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막장 파티의 한 종류에 불과했다. 금융, 부동산, 교육 등 극소수가 누리면 대다수가 사경을 헤맨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종족의 생활방식에 자신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들도 사랑을 하고, 섹스를 하고, 번식을 하겠지?'

 그녀는 잠깐 몰입했으나 이내 관심을 거두고 가던 길을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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