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시리즈>는 역대 흥행 순위에서 가장 성공한 영화 중 하나다. 특히 코로나로 개봉이 연기된 최근작 <No time to die>란 이름처럼 60년 가까이 살아남은 최장수 영화이기도 하다. 그 세월만큼이나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들도 6번 바뀌었는데, 강한 킬러였던 숀 코너리(1대), 유머러스한 신사인 로저 무어(3대), 그리고 쿨 가이 다니엘 크레이그(6대)까지 시대가 요구하는 남성상을 때마다 캐릭터에 잘 반영해 온 것이 그 성공의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제임스 본드는 영화마니아인 내겐로망이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꿈일지도 모르겠다. 잘생기고, 머리 좋고, 못하는 운동도 없다. 심지어 전 세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돈까지 펑펑 쓴다. 수많은 미녀들이 따르는 건 너무 당연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대학교 때 학번이 '~007'로 끝난다는 그럴싸한 이유까지 붙여 언제부턴가 나는 제임스 본드란 이름을 부캐처럼 써 오고 있다. 이메일 주소에 'jsbond'가 들어가고 유학 때부터 사용해 온 영문명도 '제임스'이다. 브런치명 역시 '본드형'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스로 "나는 완벽한 남자다"라는 주문을 걸고 싶었던 게다.
그런데 최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건 서른 살 중반, 늦깎이 유학을 다녀온 직후다. 1년 내내 하도 개고생을 해서인지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현지의 비싼 물가에 돈도 아낄 겸귀찮아서 길렀던 머리를 자르고 보니 정수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이미 탈모가 진행 중이었다. 마흔 살이 넘자 무릎부터 몸 여기저기에 하나둘씩 고장 나는 신호가 왔고 급기야 몇 년 전엔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찾아온 갱년기 증상으로 기억력마저 흐려지고 말았다.
그리고 작년 그 '완벽남'은 결국 완전히 무너졌다.
'허당' 본드형, 50세 나이에 뽕짝에 빠지다
갱년기 우울증이 심해지고 코로나로 회사도 어려워지면서 자의 반 타의 반 두 달 휴직에 들어갔다. 집에서만 보내야 하는 답답한 일상에서 거의 유일한 낙은 TV였는데 그중 9할은 '트롯'이었다. 특히 <미스터 트롯>은 매주 본방 사수는 물론, 수시로 넷플릭스 재방송에다 유튜브 동영상까지 열심히 챙겨봤다. 아내와 아들이 주는 눈치에도 굴하지 않고 리모컨을 절대 놓지 않으며 좋아하는 가수나 한번 꽂힌 노래라면 몇 번이고 돌려볼 정도로 중독되고 말았다. 한물 간 유행가로만 생각했던 트롯이 나를 이렇게 빠지게 만든 매력은 무엇일까?
우선, 솔직한 가사와 쉬운 멜로디 때문이리라.
얼마 전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나 말고는 손님도 없어 주인아주머니가 TV를 보고 있었는데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들릴 듯 말 듯 콧노래를 따라 부르는 게 들렸다. "나이야 가라, 나이야 가라, 나이가 대수냐. 오늘이 가장 젊은 날~" 어느새 나도 모르게 속으로 따라 부르며 발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것이 진정 트롯의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가수와 그 사연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나 역시 임영웅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나 <보랏빛 엽서>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가슴을 설렌 게 사실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장민호란 가수에 자꾸 마음이 끌린다. 잘생긴 외모로 주목을 받긴 했지만, 가장 나이 많은 출연자였고임영웅이나 영탁처럼 구성진 목소리도 사실 아니다. 한 때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하다가 안 풀려 결국 트롯 가수로 전향한 케이스로, 이미 현역인 탓에 '경연에 참석해 창피만 당하면 어쩌지' 하는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담을 꿋꿋이 이기고 최종 7명에 선발되었다. 그가 부른 <남자라는 이유로>를 듣다 보면 마음이 찡하다.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왠지 긴 무명시절을 겪었지만 드디어 때를 만나 자신의 이름을 알린 묵직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트롯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았지만 겉 멋 다 빼고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물론 살아갈 날이 많은 요즘 세대들에겐 와 닿기 힘들겠지만, 그 대중성과 함께 저마다 사연 많은 세월을 버텨낸 저력으로 100년 가까이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치 <007 시리즈> 제임스 본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요즘 아내는 가끔 나를 "허당 본드형"이라고 놀린다.
윤기 났던 외모나 날카롭던 총끼는 이미 사라졌는데도 알량한 자존심만 남은 갱년기 남편을 비꼬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좀 허술해져도 이젠 내 나이와 위치에 맞게 비우고 내려놓는 여유와 편안함을 가져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