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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Mar 23. 2021

나는 정말 트롯이 좋다

오래 살아남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다

원조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가 90세 나이로 죽었다.


<007 시리즈>는 역대 흥행 순위에서 가장 성공한 영화 중 하나다. 특히 코로나로 개봉이 연기된 최근작 <No time to die>란 이름처럼 60년 가까이 살아남은 최장수 영화이기도 하다. 그 세월만큼이나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들도 6번 바뀌었는데, 강한 킬러였던 숀 코너리(1대), 유머러스한 신사인 로저 무어(3대), 그리고 쿨 가이 다니엘 크레이그(6대)까지 시대가 요구하는 남성상을 때마다 캐릭터에 잘 반영해 온 것이 그 성공의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제임스 본드는 영화 마니아인 내겐 로망이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꿈일지도 모르겠다. 잘생기고, 머리 좋고, 못하는 운동도 없다. 심지어 전 세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돈까지 펑펑 쓴다. 수많은 미녀들이 따르는 건 너무 당연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대학교 때 학번이 '~007'로 끝난다는 그럴싸한 이유까지 붙여 언제부턴가 나는 제임스 본드란 이름을 부캐처럼 써 오고 있다. 이메일 주소에 'jsbond'가 들어가고 유학 때부터 사용해 온 영문명도 '제임스'이다. 브런치명 역시 '본드형'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스로 "나는 완벽한 남자다"라는 주문을 걸고 싶었던 게다.


그런데 최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건 서른 살 중반, 늦깎이 유학을 다녀온 직후다. 1년 내내 하도 개고생을 해서인지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현지의 비싼 물가에 도 아낄 겸 귀찮아서 길렀던 머리를 자르고 보니 정수리훤히 보일 정도로 이미 탈모가 진행 중이었다. 마흔 살이 넘자 무릎부터 몸 여기저기에 하나둘씩 고장 나는 신호가 왔고 급기야 몇 년 전엔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찾아온 갱년기 증상으로 기억력마저 흐려지고 말았다.


그리고 작년 그 '완벽남'은 결국 완전히 무너졌다.




'허당' 본드형,
50세 나이에 뽕짝에 빠지다


갱년기 우울증이 심해지고 코로나로 회사도 어려워지면서 자의 반 타의 반 두 달 휴직에 들어갔다. 집에서만 보내야 하는 답답한 일상에서 거의 유일한 낙은 TV였는데 그중 9할은 '트롯'이었다. 특히 <미스터 트롯>은 매주 본방 사수는 물론, 수시로 넷플릭스 재방송에다 유튜브 동영상까지 열심히 챙겨봤다. 아내와 아들이 주는 눈치에도 굴하지 않고 리모컨을 절대 놓지 않으며 좋아하는 가수나 한번 꽂힌 노래라면 몇 번이고 돌려정도로 중독되고 말았다. 한물 간 유행가로만 생각했던 트롯이 나를 이렇게 빠지게 만든 매력은 무엇일까?


우선, 솔직한 가사와 쉬운 멜로디 때문이리라.

얼마 전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나 말고는 손님도 없어 주인아주머니가 TV를 보고 있었는데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들릴 듯 말 듯 콧노래를 따라 부르는 게 들렸다. "나이야 가라, 나이야 가라, 나이가 대수냐. 오늘이 가장 젊은 날~" 어느새 나도 모르게 속으로 따라 부르며 발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것이 진정 트롯의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가수와 그 사연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나 역시 임영웅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나 <보랏빛 엽서>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가슴을 설렌 게 사실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장민호란 가수에 자꾸 마음이 끌린다. 잘생긴 외모로 주목을 받긴 했지만, 가장 나이 많은 출연자였고 임영웅이나 영탁처럼 구성진 목소리도 사실 아니다. 한 때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하다가 안 풀려 결국 트롯 가수로 전향한 케이스로, 이미 현역인 탓에 '경연에 참석해 창피만 당하면 어쩌지' 하는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담을 꿋꿋이 이기고 최종 7명에 선발되었다. 그가 부른 <남자라는 이유로>를 듣다 보면 마음이 찡하다.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왠지 긴 무명시절을 겪었지만 드디어 때를 만나 자신의 이름을 알린 묵직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트롯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았지만 겉 멋 다 빼고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물론 살아갈 날이 많은 요즘 세대들에겐 와 닿기 힘들겠지만, 그 대중성과 함께 저마다 사연 많은 세월을 버텨낸 저력으로 100년 가까이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치 <007 시리즈> 제임스 본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요즘 아내는 가끔 나를 "허당 본드형"이라고 놀린다.

윤기 났 외모나 날카롭던 총끼는 이미 사라졌는데도 알량한 자존심만 남은 갱년기 남편을 비꼬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좀 허술해져도 이젠 내 나이와 위치에 맞게 비우고 내려놓는 여유와 편안함을 가져보라는,

그래야 오래간다는 의미로 붙여준 애칭이란 걸 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는 트롯이, 장민호가

나는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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