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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본드형 Jul 06. 2021

면도기야 미안해

익숙한 내 몸에 소홀해지지 않기

면도기를 분해해 대청소를 했다.

구석구석 엄청난 양의 깎인 수염 잔여물이 꽉 차 있었다.

면도할 때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말도 못 하고...




나는 물건을 오래 쓰는 편이다.

고장 나면 어쩔 수 없지만 질려서 바꾸진 않는다. 그렇다고 엄청 아껴 쓰는  아니라서, 살 때 좀 비싸도 가급적 품질 좋은 브랜드를 고른다.


지금 쓰는 전기면도기는 필립스 제품인데 잔고장 없이 거의 10년째 사용 중이다. 구입 당시에는 둥근 모양의 중날 헤드가 달린 매끈한 디자인에 끌렸으나, 쓰다 보니 손에 딱 들어오는 그립감과 구레나룻나 목젖 부분 잔수염 정리용 트리머의 편리함 같은 숨겨진 매력도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무리 충전해도 끝까지 못 가더니 앵~하고 돌아가는 소리마저 시원찮다. 몇 년 전 산 아들 면도기의 우렁찬 소리와 비교하면 영 기어 들어가는 모기다. 청소해도 티가 잘 안 난다. 헤드 뚜껑을 열어 깎인 수염들을 떨어내고 수돗물을 세게 틀어 씻어내는데 잔여물이 깔끔하게 제거되지 않는다. "그래 10년 썼으면 됐지 뭐"


수염이 많이 나진 않지만 놔두면 이방처럼 보여 주말 빼곤 매일 아침 면도를 다. 하지만 요즘은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다 보니 귀찮으면 그냥 건너뛴. 그러다 보니 어쩌다 한 번하던 충전도 청소도 소홀해진 게 사실이다.


고급진 향이 그리워 맘먹고 산 애프터 쉐이브도 피부 트러블이 생겨 한두 번 밖에 못쓰고 처박혀 있다. 면도기 역시 그랬다. 기능도 쓸모도 떨어진 내 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중날 헤드를 떼어내 하나하나 조심스레 분해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부품 사이사이 십 년 묵은 세월의 시체가 켜켜이 축적되어 있었다. 1시간 넘게 앉아서 솔과 티슈로 대수술을 거쳐 완벽하게 제거했다.


다시 충전을 하고 전원 버튼을 누르니 애앵~ 하고 전보다 맑고 힘찬 소리가 들린다.


내 몸도 슬슬 여기저기 고장이 난다.

조금만 신경 써 관리하면 오래 쓸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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