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광이 여행자처럼

훌쩍 떠나다

by 본드형
둔주(遁走) :
프랑스 보르도에 살던 알베르란 한 평범한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가족과 직장을 버리고 훌쩍 여행을 떠나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도망쳐 달아난다는 뜻의 '둔주'는 여행 욕구가 폭발하던 19세 말 유럽에서 유행하다 20세기 초 사라져 버린 '해리성 정신병'으로 그 원인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미치광이 여행자>란 낭만적 제목에 끌려 빌렸다가
정신의학 논문을 분석한 딱딱한 내용이 다란 걸 알고는 건성건성 읽다 보니 어느새 대여 기한 2주가 지나버렸다.


여느 때처럼 동네 도서관에 책 반납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따가운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아내가 챙겨준 양산을 펴다가 갑자기,

나도 알베르처럼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알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어디로 가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어느새 가까운 옥수역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


역 근처 과일가게를 지날 때였다.
바구니에 가득 담긴 복숭아, 자두, 살구에서 풍기는

달콤한 여름 향들이 안 그래도 아득한 정신을 더욱

몽롱하게 만들었다.


3호선에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로 분식점에서

떡볶이와 멸치김밥을 사 먹다 문득 행선지가 정해졌다.

남한강이 흐르는 양평!


그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나는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훌쩍 떠났다.


미치광이 여행자처럼...


평일 한낮,

양평행 열차 안은 그야말로 한가로웠다.

빈자리가 많아 사람들 대부분이 띄엄띄엄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나도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밖은 뜨거운 여름이지만 안은 에어컨이 시원했고

가볍게 몸이 흔들리며 기분 좋은 졸음이 몰려왔다.

열차 소리도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칙칙

폭폭

칙폭

폭칙...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잡상인 아저씨가

구성진 사투리로

팔토시 홍보를 하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그때부터 열차 안 사람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젊은 여자는 들릴 듯 말 듯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 중이고


왼쪽 중년 아저씨는 낮술을 거하게 하셨는지

입냄새 섞인 술냄새를 폴폴 풍기고


대각선에 선글라스 낀 할아버지는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 왕년에 잘 나갔을 법하고


그 옆자리 할머니는 꾸벅꾸벅 졸다 고개가 기울어

어깨에 부딪히자 미안해하며 웃는 모습이 참 귀엽네...


그렇게 한 명 한 명 관찰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금방 흘러 양평역 안내방송이 나왔다.




양평은

정말 별게 없었다


시원한 남한강을 상상했건만

역에서 걸어가는 길은 너무 뜨거웠고

주변이 공사 중이라 먼지만 날리고 시끄러울 뿐.


30분 정도 머무르다 미련 없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를 타면서 생각했다.


알베르가 미치광이 여행자가 된 이유를

왠지 알 것 같다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그 낭만적 자유를

미치도록 사랑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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