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나의 욕망, 나의 가치, 나의 행복
대학 가고, 어른 되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공부만 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속았다. 이 말에 속아 그 피 같은 시간들을 문제집에나 버렸다. 시간이 지나 뒤늦게 깨달은 진실은, 나중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후회 없는 10대를 보낼 수 있다. 나를 내 꿈에 더 가까이 가도록 성장시키는 건 내신/수능 공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일들이다.
영화 [패치 아담스] 속 주인공은 의대를 다니면서(의사 면허를 받기도 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세운다. 여기서 패치는 환자들의 병만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의사로 성장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공부에만 메여 살던 닐 페리는 자신이 정말 원하던 연극부에 들어간다. 그리고 살면서 처음으로 진실한 행복을 느낀다.
영화감독이 꿈인 내 한일고 동기는 남들 자습할 때 짬짬이 시간을 내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영화 [혹성탈출]과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몇몇 발상을 따와서 만든 패러디 영화였다. 하지만 단순 패러디라고 하기엔 상영시간도 1시간 20분이나 되었고, 스케일도 대단했다. 공부도 잘했고, 특별전형 대상자였던 그 친구는 결국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갔다. 하지만 이 친구가 서울대를 못 갔다 하더라도 고2 때 만든 그 코미디 영화는 내 친구가 훌륭한 영화감독으로 성장하는데 서울대보다 더 큰 도움을 줬다. 그리고 그 영화를 만드는 순간 우리는 무엇보다 너무나도 재밌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나도 조연으로 출연했다 ㅎㅎ).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공부에만 매달려 산다...
공부는 말 그대로 수단이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위해 필요한 대학, 학과를 가기 위한 수단. 특히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해진 과목을, 정해진 깊이만큼 공부해 평가받는 내신/수능 공부는 더더욱 내 인생에 그 어떤 가치도 주지 않는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건 공부가 아닌 '다른 것'들이다. 물론, 나도 한일고에 입학하고 한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에 할애했다. 난 다른 애들보다 훨씬 여유로웠고(일요일엔 공부도 안 했으니...), (일탈도 자주 하고, 헬스도 하고) 활기차게 지내긴 했지만, 공부 외 다른 일에 딱히 시간을 보내진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공부라는 행위에 큰 회의감을 느끼고,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월호가 침몰했다. 그해 4월 16일은 나에게 중간고사 일주일 전이었다. 휴대폰도 금지되고, 인터넷도 없고, TV도 없던 우리는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무슨 큰일이 났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딱히 귀에 들어오진 않았고 밤 9시가 되어서야 TV 화면을 보고 실감할 수 있었다(한일고에서는 밤 9시부터 20분간의 간식시간 동안에만 9시 뉴스를 볼 수 있게 TV를 틀어줬다). 화면을 본 우리는 얼어버렸다.
그리고 9시 20분이 되어 TV 연결이 끊어졌다. 우리는 방금까지 TV에서 본 장면에 대해 계속 웅성거렸다. 하지만 이내 야자 감독이 돌았고, 조용히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다 무사히 구조될 줄 알았지만, 그렇다해도 지금 생각하면 소름 끼치는 장면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심지어 나는 당시 신문과 주간지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중간고사가 끝나면 몰아서 읽어야지' 하고 받는 그대로 사물함에 처박아 두었다.
중간고사가 끝났다. 일단 기숙사에 들어가서 좀 잤다. 일어나 저녁을 먹고, 다시 교실에 왔다. 오늘 시험이 끝났는데 자습할 분위기였을 리는 없다. 난 사물함에 쌓아둔 한겨레, 경향, 한겨레21을 다 가지고 와서 책상에 앉았다. 17일 자부터 차례로 읽었다. 읽다가 교실 안에서 읽을 수 없어 조용히 복도로 나갔다. 복도에도 있을 수가 없어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서 울면서 신문 읽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정말 부끄러웠다.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답답함에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그깟 중간고사나 잘 쳐보겠다고 이 모든 것을 외면한 채 공부나 한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이런 사람의 꿈이 "이 나라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노릇이다.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심지어 난 당시에 전국청소년정치외교연합(YUPAD)이라는 정치외교사회 분야에서 국내 최대 청소년 단체의 회장이었는데.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진정으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인 사람은 고등학생 때 뭘 하고 있을까. 분명 내신, 수능 공부만 하고 사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난 어른이 되고 나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내 꿈에 걸맞는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부끄럽지 않게,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지금 당장 내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일을 했다. 그리고 행복한 10대를 살았다.
광화문을 갔다. 이야기를 나누다 어떻게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을까 싶어 어린 마음에 세월호 진상 규명 서명지를 챙겨 학교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에 급식소 앞에서 서명을 받아 유가족 분들께 보내드렸다. 이후에도 학교 공부를 벗어나, 진짜 세상을 바꾸는 능력과 지식을 쌓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진짜 내 마음을 움직이고, 흥미를 끄는 일들을 했다. 강연도 찾아다니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책을 벗어나 현장을 보기 위해 흔히 달동네라 부르는 주거빈곤지역을 찾아가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회 현장을 보러 가기도 했다. 모두 다 재밌는 경험이었고,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게 제일 큰 도전이었던 것은 바로 '한중일 청소년 국제포럼 개최'였다.
2014년 당시는 사드(THAAD),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주변 중일 충돌 등, 한중일 사이에 많은 이슈가 터지던 때였다. 정치외교 분야에 관심 있던 나는 이 문제들에 대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몰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세계대전 이후 심히 악화된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 회복에 큰 역할을 한 것이 공동 역사교과서였고, 그 아이디어가 나온 곳이 바로 프랑스와 영국의 청소년들이 모인 자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당시 나는 정치외교 분야에서 국내 최대 청소년 조직인 YUPAD 회장이었다. 그리고 당시 나는 이런저런 일을 통해 하버드 대학교에서 아시아 리더십 센터를 운영하며 아시아 국가 출신의 리더들을 키우는데 열정을 가진 분을 알게 되었고, 종종 교류하고 있었다. 이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어 "한중일 청소년들을 한자리에 모아보자!"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래에 한중일을 이끌어갈 청소년들을 모아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생각을 나누고,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도모하는 자리를 만들자.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지만 고등학생이 하기엔 터무니없는 도전이었다. 역시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 함께 하자고 연락한 곳은 당연히 하버드 아시아리더십센터였다. 하지만 그분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박수를 치면서도, 과연 고등학생들과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후원을 먼저 받아내겠다. 그 정도면 믿고 함께 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했고, 그쪽은 '과연 그게 될까' 하면서도 당연히 그 정도면 함께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나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로부터 이름 후원과 장소 후원을 따냈다. 그 이후부터 하버드 아시아리더십센터도 붙었고, 한중일협력사무국(Trilateral Cooperation Secretariat, TCS), 동북아역사재단 등 여러 유명 단체로부터도 후원을 따내며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포럼은 성공리에 개최했다. 무엇보다 뿌듯했던 것은 삼국의 청소년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준비과정과 포럼 중 일어났던 모든 에피소드를 나누자면 끝이 없겠지만, 정말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중일, 세 나라가 협력과 번영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증명했다.
난 이 과정을 통해 엄청나게 성장했다. 내 꿈 안에서 더 큰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어떻게 설득하고 협상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지, 어떻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큰일을 도모할 때 어떻게 팀원들과 협력하며 일하는지, 영어로든 한글로든 공문은 어떻게 쓰고, 공적인 일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학교 공부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고2 때 배웠다.
작은 서명 운동에서부터 한중일 청소년 국제포럼 개최까지 진심으로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던 일들은 내신 성적, 한일고라는 이름, 명문대 유학생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나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내 꿈을 더 구체화시키고, 정교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 10대에게 필요한 진짜 성취다.
이런 인생으로 받은 나의 고등학교 최종 내신은 4등급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원한 모든 국내 대학에서 떨어졌다. 아직도 몇몇 친구들이 묻는다. 서울대 못 간 거, 후회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에 관심 없는 내 인생에서, 내 꿈을 위해 필요한 건 SKY가 아니니까. 그래서 재수도 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도 난 이 길을 선택할 거다. 이렇게 살면서 난 10대에도 내 꿈을 살며 성장했으니까. 무엇보다 가슴 벅찬 일을 하며 즐겁고, 재밌게 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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