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차
FLOW
플로우란 어떤 행위에 깊이 몰입하여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조차 잊게 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요즘 나는, 동시와 글쓰기에 몰입하고 있다. 네 살 때부터 기차(지하철)를 좋아한 아이는 전개도나 블록으로 기차를 만들고 영상 찍고 자료 만드는 일에 몰입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지만 좋아하는 하나에 몰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몰입하는 순간에는 온전히 그 세계에 푹 빠진다. 배고픔도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세 시간을 30분처럼 느낀다.
우리 둘은 닮았다. 둘 다 호기심이 많다. 관심 없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않지만 관심 두는 순간 하나만 판다. 깊이. 오래.
내가 무언가에 처음 몰입해 본 것은 30대 초반이었다. 작사에 꽂혀서 여기저기에 가서 배우고 매주 노래방에 가서 이 가사 참 좋다, 별로다 하며 놀았다. 한국저작권협회에 작사가명으로 검색해서 노래 가사를 모조리 찾아보려고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함께 배우던 동생들이랑 한 2년 정도는 작사 얘기만 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배운 것에 의의를 두고 접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나의 두 번째 몰입은 러시아어 통역사로 살았던 시절이었다. 공부하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할 수 없으니 단어를 모르면 입을 뗄 수 없으니 억지로라도 파다가 오기로 팠던 것이 나중에는 궁금해서 파게 되었다. 내 별명이 '검달'이다. 검색의 달인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와 미국, 러시아 포털 사이트를 다 뒤져서 원하는 정보(단어)를 꼭 찾아내던 몰입의 시간 덕분에 지금도 뭐든 금방 잘 찾는다.
나의 세 번째 몰입은 육아였다. 나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편이다. 친구, 남자친구의 경우에도 그랬는데 내가 낳은 아이에게 집중하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찾고 실천하며 아이 4살까지는 육아에만 몰입했다. 아이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 없다.
그 이후의 나의 몰입은 그림책이었다. 지난 6년 동안 많이 찾아 읽고 배우고 서평 쓰고 했다. 그쯤 파고 나니, 이제 좀 알겠다는 감이 왔다. 내가 한 분야를 7년 정도 팠다면 누군가 10년 판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회사 다닐 때도 다른 사람들이 2년 걸린 것을 6개월 만에 습득했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집중하면 익히는 감이 남들보다 빠른 편이다.
그런데 내가 독서와 공부에 몰입하게 된 건 사십 이후다. 내 아이는 나보다는 빨리 독서와 공부에 몰입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어떤 계기(동기부여)가 필요한데 아직 그걸 모르겠다. 발동만 걸어주면, 꽂히게만 하면, 알아서 열심히 할 스타일인데 그걸 찾아주고 싶다.
조금 더 밀도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세상이 온통 그것으로 보이고, 파도파도 끝이 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내가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뿌듯하고 행복하다.
내게는 앞으로 몇 년 동안 몰입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래서 2025년 마지막 날과 2026년 첫날이 별 차이 없을 것 같다. 뭐든 파면 '감'이 올 때까지 몇 년은 파야하니까.
몰입의 순간에는 주변 소음을 신경 쓸 시간이 없으므로 남이 나에게 하는 기분 나쁜 말과 이상한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몰입은 온전히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세계, 같은 시공간에 사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세계에 몰입한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눠져 있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몰입한 사람에게는 그 얘기를 할 때 반짝이는 눈빛이 있다. 자신의 소중한 에너지를 한 곳에 모으는 사람은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