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차
사람들이 날 보고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묻는다. 내가 자꾸 뭘 하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맞다. 나는 할 일이 계속 있다.
아침에 초등생 아이를 등교시키고 나면 그때부터 마치 모래시계를 누가 돌려놓은 것 같은 시간 동안에 할 일을 한다. 물론 아이가 와도 내 할 일을 하면 되지만 집중도가 확실히 떨어진다. 그렇다 보니 아이가 없는 시간은 정말 소중하다. 집안일은 최대한 빨리 후다닥 해버리는 편이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저절로 손이 빨라진다. 약속이나 모임이 있는 날은 오전 시간이 한 시간처럼 지나가버린다.
아이가 오기 전까지, 산책이나 운동을 잠깐 하고 도서관에 가거나 집에서 보고 싶은 책을 읽는다. 아직 읽을 책이 많다. 볼 책이 자꾸 늘어나서 그렇다. 좋은 글을 필사하거나 내 글을 쓴다. 서평일 때도 있고 인스타그램과 브런치에 쓰는 글일 때도 있다. 매일 뭐라도 쓰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다 보면 11시가 조금 넘는다. 그때쯤 야채와 단백질이 들어간 건강한 점심을 만들어먹는다. 그리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물론, 어쩌다 유튜브를 연 날은 영상만 보다 끝난다. 그게 나의 오전 루틴이다. 알람처럼 아이가 "엄마, 나 끝났어."하고 전화를 하면 세상 반가운 목소리로 어서 오라고 답하고는 아직 못한 일들을 주섬주섬 정리한다. 하려던 일은 늘 다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겐 힐링 시간이다.
아이를 갖기 5개월 전까지 일을 했다. 그런데 내가 15년 동안 한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 6년은 지옥 훈련 같았다. 통역대학원을 수료 또는 졸업한 학력이 있었다면 나도 자료를 몇 주전에 받고 공부할 시간도 주어진 후에 투입되는 통역을 했을까? 일정 시간이 넘어가면 2인 1조로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하는 통역을 할 수 있었을까?
학부 졸업생이라서 배운 것은 더 적은데 '빡센' 현장 투입되는 일을 오래 했다. 실전에서 맨 땅에 헤딩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생존 통역'을 하며 살았다. 회사에서 통역해야 하는 것들은 주로 어려운 기술적인 내용들이었으며 대외비라는 이유로 회의에서 자료들을 처음 보며 통역해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 자료 폴더를 열 때마다 내 수명이 조금씩 단축되는 기분이었다. 통역 내용만 힘들었던 게 아니었다. 회의는 보통 두세 시간이 기본이었다. 내가 담당하는 러시아인 수석이 3명이라면 나는 최소 세 개에서 여섯 개의 과제에 투입된다. 한 사람을 통역하고 녹초가 되어 자리에 돌아오면 다른 사람과 또 다른 과제를 하러 가야 했다. 그 정도 기계를 돌렸으면 기계도 뜨거워졌을 텐데 난 사람인데 계속 머리를 써야 했다. 우리말을 그대로 외워서 전달하라고 해도 머리에 쥐가 날 텐데 쉽지 않은 내용을 우리말과 외국어로 통역하는 일은 극도로 긴장해야 하는 일이었다. 시간상의 이유로 순차통역이 아닐 때도 많았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말을 하지만 나는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통역해야 하니 그 긴 시간 동안 혼자 쉴 새 없이 동시 통역해야 할 때가 많았다. 나라는 사람의 집중력과 체력의 한계를 실험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다 회의가 없는 시간이 있어도 볼 자료가 넘쳐났다. 모르는 내용은 왜 그렇게 많은지 집에 가서도 공부하고 단어를 찾아야 했다. 그래야 내일 또 회사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 가면 또 모르는 내용에, 제대로 못한 통역에 좌절해야 했다. 끊임없이 넘어가는 피피티 자료 화면에서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까 봐, 혹시나 거기에 쓰여 있는 영어와 내가 다르게 러시아어로 말했을까 봐 늘 긴장해야 했다.
초집중해야 하는 극한의 상황을 버티고 또 버티다가 어느 날부터 속으로는 떨고 울고 있지만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자동으로 통역하는 기계가 되었다. 주중에 당일로 통역하러 지방 사업장이나 협력사에도 많이 다녔다. 이런 포지션으로 일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병도 얻었고 전신마취 수술도 두 번이나 했다.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해왔던 나라서였을까? 나는 솔직히 육아가 할만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해내는 게 어렵지 않다. 아이 챙기면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할만하다. 웬만한 일은 힘들지 않다. 뭘 해도 그때만큼은 힘들지 않으니까.
자주 울었고 많이도 절망했던 그 시절의 나를 만나서 꼬옥 안아주고 싶다. 그 시간을 버텨낸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인 내가 좋다. 초몰입하고 한계를 극복했던 경험, 그 시간 덕분에 하기 어려운 일이 아직은 없다. 뭐든 마음만 먹으면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누군가는 뭘 그리 힘들게 사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늘어난 만큼 불어야 팽팽해지는 풍선 같은 거다. 하루에 열 가지를 하던 사람은 그걸 유지해야 생기가 돈다. 활력이 생긴다.
나는 아직 알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도 할 일이 많은 사람처럼 일찍 일어나고 꽉 찬 하루 보낼 것이다. 뭘 해도 그때만큼은 힘들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