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03화

03 만월 3

by 아무



김 씨가 도월의 부름을 받은 것은 한 시진이나 지난 뒤였다.

“들어가겠습니다.”

지배인이 고하고 문을 열었다.

넓은 귀빈실 안에 도월은 홀로 앉아 있었다.

지배인 옆에 선 김 씨는 마른침을 삼켰다.

힘이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고, 키도 제가 크고 덩치도 제가 큰데, 이상하게 도월만 만나면 긴장이 되어 입이 마른다.

술을 마시면 풀어질까 싶었지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김 씨는 조심히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기다란 식탁이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김 씨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앉게.”

김 씨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았다.

“한 잔 하지.”

도월이 빈 잔에 술을 따라 김 씨 앞에 놓았다.

김 씨가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한 번에 마시자 도월도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이 보름이라지.”

무심히 말을 던지고 김 씨와 눈을 맞추었다.

서늘한 눈빛에 김 씨는 식은땀이 흘렀다.

도월이 눈짓하자 지배인이 곁으로 다가와 기다란 물건을 내려놓고 방을 나갔다.

헝겊에 싸인 기다란 물건, 날붙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곧 한 놈이 올 것이다. 이번엔 명줄을 끊어야 하니 알고 있어라.”

지독하게 침착한 그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김 씨는 저도 먹고 사느라 별 짓 다 하지만 이 양반이 하는 양을 보면 도저히 피가 흐르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드러내놓고 고리대금업을 하는 양반이라니, 고귀하신 양반들께서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도월을 쉽게 등지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재물 때문이다.

한경에서 제일가는 재력가이니 그에게 한 번이라도 신세를 지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라 한다.

신세라고는 하지만 결국 고리대금이니 도월이 손해를 보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도 상대의 사정에 따라 고리대를 깎아 주기도 하고, 이따금 온정을 베풀기도 하였는데, 이는 약조를 잘 지키는 자에 한해서라고 한다.

지금처럼 김 씨가 그에게 불려 온다는 건 약조를 어긴 자가 있다는 뜻이다.

도월은 그가 부리는 수하가 있음에도 이런 일엔 꼭 김 씨나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부르는 수고를 더했다.

그들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한 번에 큰 삯을 주니 김 씨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도월이 김 씨의 술잔에 술을 다시 채웠다. 두 사람은 한 번 더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술잔을 내려놓는 순간, 객실의 문이 울렸다.

“들어오게.”

도월의 수하 둘이 한 사람을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흐트러진 양장 차림에 잔뜩 겁먹은 얼굴, 끌려온 사람의 행색이 가관이었다.

“보아하니 오늘도 갚아야 할 돈을 다 준비하지 못한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나리.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면 꼭 돈을 마련해 오겠습니다.”

“기한을 더 준들 갚을 수나 있겠는가? 돈줄을 제 손으로 끊어 먹었다 들었는데.”

“아닙니다. 찾을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나리. 제발!”

끌려온 남자가 넙죽 엎드려 사정하는 모습을 보고도 도월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백귀에게 잡혀갔다는 여인을 무슨 수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오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찾아 온들 무슨 소용인가. 그 여인이 황금이라도 낳아 준다던가?”

“그년 찾아서 무대 몇 번 세우고 양반 나리들 밤시중 몇 번 들면 금방입니다. 눈먼 돈이 절로 모입니다요.”

하아.

도월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란이라는 가희를 아는가?”

“모, 모릅니다.”

대뜸 묻는 도월에 놀란 김 씨가 대답했다.

“그 가희를 등쳐 먹고살던 자인데, 그 여인을 보고 돈을 빌려줬더니, 여인이 훨훨 날아가 사라졌다지 않나.”

도월이 술잔을 기울이며 그자더러 들으라는 듯 김 씨에게 설명했다.

김 씨는 도월이 말한 가희가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저 기름 낀 얼굴이 선량한 여인을 등쳐 먹었다 생각하니 괘씸함이 밀려왔다.

김 씨는 말없이 날붙이를 손에 쥐었다.

도월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잘 가시게.”

탁.

도월이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도월에겐 그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객실의 문이 닫혔다.

김 씨와 그의 수하는 말없이 작업에 돌입했다.


“하아, 하아.”

툭.

김 씨의 손에서 벗어난 날붙이가 그자의 육신 위로 떨어졌다.

수하 중 하나가 새 옷과 물에 적신 천을 건넸다.

천으로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김 씨는 죽은 이를 돌아보지 않고 그 방에서 빠져나왔다.

김 씨의 역할은 행위까지였고, 뒤처리는 그들의 몫이었다.

주머니는 두둑해졌지만 입맛이 쓰다.

사람의 명줄을 제 손으로 끊는다는 건 역시 주먹질로 겁이 나 주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일이다.

‘퉷’

김 씨는 한경관의 뒷문을 나서면서 침을 뱉었다.

이런 날에는 술이 필요하다.

‘주막에 들러 술이나 사가야겠군.’

발을 재촉하며 고개를 들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젠장.’

오늘은 통금 때문에 주막뿐 아니라 모든 점포가 이미 문을 닫았다.

이 거리만 통금이 통하지 않았다.

김 씨는 방금 나온 뒷문을 다시 두드렸다.

막 배웅하고 들어갔던 지배인이 문을 열었다.

“잊은 것이 있나요?”

“돈은 드릴 테니, 술을 좀 주시오.”

지배인이 싱긋 웃었다.

“오늘 같은 날은 술이 필요하겠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지배인은 주방으로 들어가 술 세병과 안주거리를 보자기에 싸 가지고 나왔다.

“돈은 되었어요.”

도월에게 받은 돈주머니를 꺼내려하자 지배인이 극구 사양했다.

김 씨는 술 보자기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날붙이를 타고 전해지던 그 감각이 손에 남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거리가 휘황찬란하다.

이곳은 매일이 축제였다.

화려한 빛 속을 흥청거리는 면면이 전에 없이 역하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시끌벅적한 환락가를 벗어나 다리를 건너자 이번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하다.

주변이 조용하니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뒤처리는 알아서 한댔으니 뒤탈은 없겠지? 도월 나리의 일이니 조용히 수습될 거야. 아니 보름날 사라졌으니 소문이 돌 텐데. 소문은 언제쯤 퍼지려나. 그자 말고 또 사라진 사람은 없겠지?’

같은 생각이 돌고 돌았다.

‘젠장, 얼른 가서 술이나 마셔야지.’

김 씨는 상념이 더 깊어지기 전에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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