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02화

02 만월 2

by 아무



저자가 어수선하다.

오늘 밤은 통금이 이르기 때문이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 시진(두 시간)이나 남았고, 통금은 그보다 더 남았는데도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머지않아 행인도 상인도 썰물처럼 빠져나갈 터이다.

이미 매대를 정리 중인 점포가 태반이다.

뒤늦게 달려와 휘뚜루 장을 보는 사람도 있다.

“콩나물 남았소?”

“얼마나 필요하시우?”

“이 전어치만 주시오. 두부도 있소?”

“하나 남았어.”

“그것도 주시구려.”

“뭐 더 필요한 것 있소?”

“아유, 또 뭐가 필요하더라.”

아낙이 발을 동동거리며 좌판을 살폈다.

“이거 싸게 드릴 테니 가져가실라우?”

채소 가게 여주인이 인심 쓰는 척 애호박을 권했다.

“하나 더 얹어 드리리다.”

아낙이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마음이 급해서인지 여주인의 상술에 넘어갔다.

“다 주시구려.”

“오이 하나 남았는데, 이것도 넣어 드릴 테니 가져가서 드시우.”

날이 날이니 만큼 여주인도 일찍 문 닫을 생각인지심덤으로 남은 채소를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또 보름이구먼.”

“시간 참 빨라.”

“그러게나 말이야.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세.”

“그나저나 김 씨는 어디로 배달 가길래 저리로 가는 겐가?”

“저 강 건너 한경관.”

“여기서 한경관까지 물건을 대나?”

“그럴 리가 있나. 가끔 급하게 필요할 일이 있나 보지, 뭐.”

“거참, 희한한 일이로군. 그 아무나 못 간다는 고급 요릿집에서 이 저자의 물건이 필요할 때가 다 있다니.”

채소 가게 남주인이 이웃한 생선 가게의 일에 참견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일보다 남의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를 늘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생선 가게 주인은 요령 좋게 관심을 돌렸다.

“저 안주인은 손님 보느라 바쁜데, 자네는 빨리 정리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어, 해야지. 빨리 해야지.”

남주인이 히죽 웃고는 가게 안채로 들어갔다.

생선 가게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문득 심부름꾼 김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 씨는 세상 일에 너무 관심이 없어 탈이었다.

그러니 오늘이 보름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를 수도 있다.

적어도 생선 가게 주인이 보기에는 모르는 눈치였다.

‘알려줘야 하나.’

좌판 위에 아직 팔지 못한 생선이 몇 마리 남았지만 오늘 치 납품은 모두 끝낸 생선 가게 주인이 조금 전 배달을 떠난 심부름꾼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김 씨!”

벌써 저만치 멀어진 심부름꾼은 저를 부르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이! 김 씨!!”

생선 가게 주인이 더 크게 소리치자, 이번에는 알아들었는지 뒤돌아 보았다.

“오늘은 그만 접어-.”

김 씨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 주변을 살폈다.

그제야 평소보다 더욱 어수선한 저자의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오-야.”

심부름꾼 김 씨가 빈 손을 들고 알겠다는 듯 흔들며 걸걸하게 소리쳤다.

다른 한 손에는 밀랍 종이에 싸인 생선 뭉치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제기랄.”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쓴 입맛을 다셨다.

“보름이 뭐라고. 오늘 품은 이걸로 끝이군.”

시끌벅적한 저자를 뒤로 하고 작게 불평했다.

무더운 날씨에 땀방울이 턱을 타고 흐르자 목에 걸친 눅눅한 헝겊으로 거칠게 닦아 내었다.

‘아니지, 굳이 강 건너 생선 가게에서 심부름을 시킨 걸 보면 분명 다른 볼 일이 있는 게야.’

김 씨는 생각을 고쳐먹고 성큼성큼 걸었다.


김 씨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김 씨라 불렀고, ‘심부름꾼 김 씨’가 그를 지칭하는 말로 통했다.

한경 출신도 아닌 그가 연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발 붙이고 살 수 있었던 까닭은 적당한 대가만 치르면 껄끄러운 일도 대신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다.

대개는 심부름이나 허드렛일로 헐한 삯을 받았고, 드물게 험한 일로 큰 삯을 벌어 생계를 유지했다.

큰 삯을 버는 일은 주로 거상이나 지체 높은 분들의 의뢰였으므로 다들 알아도 모르는 체했고, 김 씨 역시 나서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도 있었는데, 김 씨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기가 남 일에 관심 없었기 때문에 남들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도 관심 없었던 탓이 크다.

누가 자기를 싫어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기 할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험한 일의 횟수가 늘수록 김 씨를 거북스러워하는 이가 늘어났다.

반대로 김 씨의 입장에서 보자면 보름만 되면 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야단법석을 떠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는 평범한 하루일 뿐인데 말이다.

보름만 되면 백귀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간다니, 참으로 우습다.

범죄가 날을 정해놓고 일어나겠는가.

남몰래 그가 낸 사고만 해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허튼짓하고 앉아 있네.”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부끼는 벽보를 보고 그가 중얼거렸다.

김 씨로선 저녁나절 품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조금쯤은 불만스러웠다.

생선 꾸러미를 들고 영천강에 걸린 다리를 휘적휘적 건넜다.

다리만 건넜을 뿐인데 마을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건너편 저자는 하루를 끝내느라 어수선했고, 이곳은 시작하느라 분주했다.

이곳 홍연가는 환락의 거리라 불릴 만큼 유희로 가득 찬 거리였고, 김 씨의 목적지인 ‘한경관’이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 곳이기도 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궁과 마주 보는 한경관은 한경 최고의 요릿집이었다.

어지간한 재력이 아니면 문턱도 넘기 힘들었기 때문에 거상이나 양반들이 애용하는 밀회의 장이기도 했다.

길고 긴 환락가를 지나 마침내 한경관에 다다랐다.

김 씨는 으리으리한 건물을 빙 돌아 일꾼들이 드나드는 뒷문으로 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쾅, 쾅.

몇 차례 문을 두드리자 양장 차림의 여자 종업원 하나가 나왔다.

“심부름 왔소이다.”

김 씨가 꾸러미를 높이 들어 보였다.

“기다리세요.”

종업원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역시 일거리가 있나 보군.’

가끔 이곳에 심부름을 올 때면 물건만 받아가고 말았는데, 오늘은 사람을 부르러 갔다.

여자 지배인이 나올 것이다. 그럼 일이 있다는 뜻이다.

“생선 가게에서 보냈지요?”

붉게 입술을 칠한 여자 지배인이 다가와 물었다.

“그렇소.”

“따라오세요.”

지배인이 앞장서서 김 씨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잠깐 계세요.”

주방 입구에 김 씨를 세워두고 주방장을 불렀다.

지배인의 부름에 곧바로 주방장이 나왔다.

생선 꾸러미를 건네고 지배인이 귀엣말을 속삭이자 주방장은 김 씨를 한 번 흘겨보고는 휙 하니 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쪽으로 오세요.”

지배인이 김 씨를 주방 옆 작은 방으로 이끌었다.

“다음 용무는 없지요?”

“그렇소만.”

“그럼 한 상 차려줄 테니 여기서 좀 쉬고 계세요. 도월 나리가 그쪽을 좀 붙잡아 두라고 하셨거든요.”

“도월 나리요? 기별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랍니까?‘

김 씨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답했다.

“기다려 보면 알게 되겠지요.”

지배인은 자신의 용건이 끝나자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환락가의 흥은 보름이라고 해서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불타올랐다.

그들에게는 고리타분한 백귀 타령임에도 모든 객실의 화젯거리에서 백귀와 보름이 빠지지 않았다.

지배인은 긴 복도 끝에 있는 귀빈실로 향했다.

한경관의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오셨습니까, 나리.”

“부탁한 건 어찌 되었나.”

반듯한 양장 차림의 남자가 인사도 않고 용건부터 꺼냈다.

“말씀하신 대로 아래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그래. 그럼 식사부터 하지.”

“예, 식사 올리겠습니다.”

지배인은 객실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리가 오셨으니 식사 후에 부르실 거예요.”

배불리 먹고 드러누운 김 씨가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거 참, 뭔 일인지.”

탁!

지배인이 김 씨 앞에 놓인 밥상에 술병을 하나 내려놓았다.

“마시려거든 마셔요.”

김 씨는 흔쾌히 손을 뻗어 술병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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