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뜨는 밤, 통행을 금한다.’
현령의 명으로 거리 곳곳에 이러한 방이 붙었다.
원래 삼경(밤 11시)부터 통행금지인 것을 보름날 밤에는 이경(밤 9시)부터 통행을 금하겠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방을 붙인 포졸이 크게 읽자 지나가는 행인들이 몰려들었다.
“이경부터 통행을 금한다고?”
“통행금지만 한다고 해결이 되겠어?”
“뭔 수를 쓰겠지.”
“참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여.”
“백귀다 뭐다 해도 결국 화적들 짓 아니겠어?”
여기저기에서 한 마디씩 던지자 금세 주변이 소란해졌다.
오랜 가뭄과 병충해로 흉작이 여러 해 이어지자 백성들의 삶은 더 할 수 없이 궁핍해졌다.
끼니를 거르는 일은 예삿일이고 굶어 죽는 이 또한 무수했다.
궁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명을 달리 하는 자도 적지 않았고, 고작 제 입에 풀칠하자고 도둑질부터 사람을 해하는 짓까지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르는 이가 급격히 늘어, 날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또 제 잇속만을 챙기고자 잔악한 짓을 서슴없이 벌이는 이까지 나타났으니 세상은 어지럽기만 하였다.
연이은 잔악한 범죄의 시원에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하나 얽히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백귀 설화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달빛 아래로 천상의 하얀 범이 내려와 지악한 자를 물어가니 태고에 평안하였다.
신의 보살핌으로 태평을 누리니 지상이 낙원이로다.
하나 긴 세월 안녕에 아둔해진 인간은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날뛰었으니, 오랜 난세가 그 대가라 하겠다.
난세 속에서도 뉘우치기는커녕 천상의 범도 옛말이다, 눈멀고 귀먹었는지 지악한 자 벌하지 않고 선한 자까지 앗아가더니 이제는 이 놈 저 놈 사양 않고 걸신들린 듯 마구 앗아간다, 하며 천상의 범을 욕보였다.
거기에 더하여 천상의 범을 다스리는 신을 백귀라 부르며 모독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신이 노하여 역병이 창궐하고 흉작이 끊어지지 않는다 하더라.
이 만월의 백귀가 검은 속내를 가진 이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제멋대로 사람을 해치고 백귀에게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니 이보다 좋은 구실이 어디에 있겠는가.
덩달아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인육은 몹쓸 병에, 간과 쓸개는 양매창, 음경은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 퍼진 까닭에 사람을 해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발생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관아에서는 보름날 밤의 ‘통행금지’를 명하고, 순라를 늘렸으나 별 효과는 보지 못하였다.
만월이 돌아왔다.
시중은 오늘이 보름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활기가 넘쳤다.
두루 통하는 이야깃거리가 있으니 오히려 더욱 북적이고 소란했다.
어디선가 ‘보름’이라는 단어가 들리기만 해도 언제는 누구네 집 누가 물려가고, 언제는 건넛마을 누가 사라졌다더라, 하고 이 집 저 집을 들먹이며 너 나 할 것 없이 떠벌리기 바빴다.
어떤 자는 여기서 했던 말 저기서 또 하고, 다른 자는 여기서 들은 말 저기 가서 덧붙여 전했다.
“통금 방이 붙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백귀인지 백호인지가 활개를 치니.”
“오늘도 뭔 일 나겠지?”
아주 남의 일인 양 누군가가 말을 던졌다. 그러자 백귀가 나타날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한 무리가 침을 튀기며 논쟁을 벌였다.
그러다 논쟁은 돈내기로 이어졌고, 누가 장난 삼아 십 환을 걸자 너도나도 쌈짓돈을 걸기 시작했다. 판돈이 십 환에서 백 환으로 불었다.
무리에 섞여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담은 난처하게 웃으며 슬쩍 뒤로 물러 섰다.
그때 무리 앞을 지나는 한 여인이 이담의 눈에 들어왔다.
밤사이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지만 한낮의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내리쬐는 햇볕과 지면이 내뿜는 열로 거리는 찜통과 다를 바 없었다.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 중 무더위에 지쳐 비실대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여인의 안색은 그들과 확연히 달랐다.
이담은 여인의 창백한 낯빛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어서 나도 잡아가.’
행색과는 다른 강한 염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담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여인의 신상을 살폈다.
파리한 낯빛과 퀭한 두 눈, 바싹 메말라 가칠한 입술에는 생기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고, 뒤로 한데 모아 묶은 긴 머리카락은 윤기 없이 버석하기만 했다.
또 옷은 햇빛을 가리기 위함인지, 마른 몸을 숨기기 위함인지,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러 겹을 껴입었다. 길게 드리운 옷소매가 손등까지 다 덮어 손가락만 겨우 보였는데, 그 손가락마저 핏기가 없고 뼈가 불거져 나왔다.
거기에 느른하게 걷는 여인의 움직임을 보고 이담은 마치 산송장 같다고 느꼈다.
여인이 어느 좁은 길목 앞을 지나가자 근처에 선 한 무리의 남녀가 쑥덕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이담의 귀에 들어와 박혔다.
“저 집 애도 백귀한테 당했다지.”
“산에서 시체가 발견됐다지 않나. 그러니 그게 어디 백귀였겠어.”
“그럼 백귀가 아니고 뭔가.”
“자네는 귀를 닫고 사는 겐가? 백귀 흉내 내는 화적 떼 짓이겠지.”
“배를 갈라 간이랑 쓸개만 홀랑 빼갔다네, 글쎄.”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어린것을.”
“이제는 그 백귀 흉내 내는 화적 놈들이 때도 무시하고 사람을 잡아가니, 이거야 원!”
“징그러운 놈들. 천벌을 받아도 시원찮을 놈들. 백귀고 나발이고 어디 사람을 해하고 말이야. 벼락 맞아 죽을 놈들.”
한 여자가 분개했다.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근데 저렇게 혼자 돌아다니게 둬도 되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인가. 저러고도 여즉 살아 있는 거 보면 명이 질긴 게지.”
저 잡아가라고 저렇게 혼자 돌아다니는 여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처량했다.
이담은 기척을 숨기고 그녀의 뒤를 밟았다.
머지않아 여인이 길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
“이보오”
걸걸하게 쉰 목소리가 여인을 불러 세웠다.
반대편 길모퉁이에 위치한 약방 어르신이었다.
익숙한 듯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여인이 작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거나 한 잔 들고 가게나.”
백발의 어르신이 찻잔을 내밀었다.
“당귀랑 이것저것 넣어 끓인 차인데, 마침 딱 마시기 좋게 식었어.”
여인이 느릿느릿 다가가 찻잔을 받아 들었다.
“항상 감사합니다.”
외관만큼이나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찻잔은 천천히 기울었다.
여인은 빈 잔을 돌려주며 다시 입술을 달싹였는데, 지척에 있는 이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가 작았다.
“뭐 별거라고.”
어르신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이만 가보라는 듯 부채를 휘적이자, 여인은 한 번 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후유.”
약방 어르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가련했기 때문이다.
어르신은 가련한 여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고, 그 형체가 저만치 멀어진 뒤에야 시선을 거두었다.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담의 시선과 여인에게서 거둔 어르신의 시선이 찰나에 마주 닿았다.
그러나 이담은 알은체하지 않았다.
어르신도 못 본 체 약방의 유리 격자문을 굳게 닫고 안채로 들어갔다.
이담은 멀어진 여인의 뒤를 다시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