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낙원 04화

04 만월 4

by 아무




둥근달 아래 세상이 환히 빛난다.

깊은 어둠은 달빛에 밀려 밤하늘 위로 떠올랐다.

마을엔 고요가 깃들었고, 고요는 상념을 들쑤신다.

지나친 상념은 정신을 흩트리고, 흐트러진 정신은 진실을 외면한다.


한 사내가 달빛 속을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이 사뿐하다.

이따금 미지근한 바람이 불고 풀벌레 소리가 울리니 끈적한 여름밤도 제법 산뜻한 정취를 풍겼다.

정취에 취한 사내의 마음이 옮았는지 그의 옷자락이 산들거렸다.

바람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사내는 인적이 끊긴 길 위를 홀로 걸었다.

각각의 집에는 저마다의 기운이 서려 색과 온기가 다채로운 정기가 생동했다.

그 속을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 팔락 팔락 부채 소리, 달각달각 그릇 소리, 키득키득 웃음소리, 소곤소곤 귀엣말 소리가 날아다닌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귀가 밝은 사내에게는 그 모든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그러나 사내는 달빛에 취해 담벼락 너머에서 전해지는 작은 인기척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 댁 규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백귀를 구경하러 나온 모양이다.

보름달이 뜨면 사람 잡는 백귀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는 풍문이 여인들 사이에 은밀히 퍼진 탓이다.

사내를 몰래 훔쳐본 규수가 담벼락 아래로 털썩 주저앉았다.

겁을 먹을 탓도 있겠으나 상기된 얼굴로 보아 사내에게 홀린 듯하다.

백귀라 불리는 사내는 그제야 인기척을 느꼈으나 개의치 않고 달빛을 받으며 걸었다.


타다닥.

어느 순간부터 작고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귀에 날아들었다.

그러나 백귀는 자신의 뒤를 밟는 작은 발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달빛 아래 길을 걸었다.

얼마 후, 뒤따르는 발소리가 하나에서 셋으로 늘었다.

작은 발소리가 먼저 타다다다닥 하고 울리면, 박자가 어긋난 두 개의 거친 발소리가 그 뒤를 따라 울렸다.

반복되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백귀는 모퉁이를 돌아 몸을 숨겼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밟는 이가 누구인지 엿보았다.

작은 발소리는 이제 막 여인의 태를 내는 소녀였고, 거친 발소리는 사나워 보이는 남자 둘이었다.

몸을 숨겼을 때, 소녀는 서둘러 자신의 뒤를 따랐고, 남자 둘은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녀의 목표는 백귀였고, 남자들의 목표는 소녀였다.

앞에 걷던 사내가 사라진 틈에 소녀를 해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소녀는 잰걸음으로 백귀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놀라 발을 멈추었다.

휙 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자 히죽 웃는 남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깜짝 놀라 도망가려고 하자 남자 하나가 날쌔게 소녀의 팔을 붙잡았다.

얼마나 힘이 센지 잡힌 팔이 부러질 듯 아팠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

“쓰읍, 실제로 보니 그냥 보내기엔 아까운 얼굴인데?”

수염이 덥수룩한 자가 한 손으로는 소녀의 팔을, 다른 한 손으로는 소녀의 턱을 잡고 말했다.

“일 그르치지 말고……!!”

얼굴이 긴 자의 눈이 무엇을 보았는지 동그랗게 뜨이고 말문이 막혔다.

그 순간이었다.

소녀의 등에 서늘한 기운이 스몄다.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고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소녀도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배, 배… 백호다!”

두 사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소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척에 있는 범을 보자 온몸의 피가 식었다.

남자들처럼 도망쳐야 했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던 범이 소녀를 스쳤다.

백호의 꼬리가 소녀의 허리를 훑고 지나가자, 온몸의 털이 쭈뼛 섰고 사지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안 돼! 정신 차려!’

소녀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꾀를 내어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범이 소녀 앞에 서서 으르렁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두 사내가 허둥지둥 달아났다.

이제 길 위에는 범과 소녀만 남았다.

소녀는 그저 백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백호가 느릿느릿 몸을 돌려 소녀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소녀에게 바짝 다가와 머리를 들이밀고 꼬리 끝을 살랑거렸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호가 그르렁거렸다.

제 손으로 만지면서도 실제인지 꿈인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사라진 백귀가 언제부터였는지 백호 옆에 조금 언짢은 얼굴로 저를 보며 서 있었다.

“백귀님이신가요?”

소녀가 망연히 물었다.

“인간들이 그렇게 부르더군.”

소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내게 무슨 용건이라도.”

“용건은 아니고,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됩니까?”

“이름이 뭐지?”

“서윤희입니다.”

“서윤희라.”

백귀가 소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노골적인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소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손에서 멀어진 백호를 찾는 시늉을 냈다.

“어디 갔지?”

성체였던 백호는 사라지고 자그마한 새끼 백호가 백귀의 발 밑에 배를 까고 드러누웠다.

놀란 소녀가 가만히 아래를 응시하다 나풀거리는 종이를 발견했다.

“하아.”

소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널브러진 용모파기를 주워 손으로 구겼다.

“랑-.”

백귀가 어깨를 툭툭 치자 새끼 범이 그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깨에 척 걸렸다.

“내가 사는 곳은 네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듣기에 부탁하면 데려가 줄 거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랬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널 데려갈 수 없어.”

“저는 이곳에 남으면 죽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까?”

백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윤희라 했던가?”

“예 백귀님.”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소녀가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확실치는 않으나 어머니가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저도 그렇겠지요.”

백귀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소녀의 치마허리에 달린 노리개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너와 어울리지 않는 노리개를 달고 있구나.”

“어느 양반 나리께서 하사해 주신 노리개입니다.”

“어느 양반이라. 자세한 사정은 가면서 듣지. 따라와.”

백귀가 소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어깨에 매달린 백호의 턱을 긁으며 앞서 걸었다.

백호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끼며 갸르릉거렸다.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야.’

백귀가 자신을 지나칠 때까지 넋을 놓고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정은 가면서 듣지? 따라와?’

소녀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산길로 들어서자 백귀는 랑이라는 새끼 백호를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백호는 흙길에 드러누워 이리저리 뒹굴더니 무엇을 보았는지 팔딱팔딱 뛰었다.

그 모습이 아기 고양이 같아 귀여웠다.

“백귀님, 저 범에 대해 물어도 됩니까?”

“뭐가 궁금하지?”

“분명 처음 보았을 때는 제가 본 범 중에서도 가장 큰 범이었는데, 지금은 왜 새끼 범이 되었습니까?”

“저게 본모습이야. 이름은 랑.”

“아, 그렇군요. 랑.”

소녀는 백귀가 알려준 범의 이름을 되뇌었다.

“올해 백스물다섯이던가. 이제 백 년 조금 더 산 새끼 범이지.”

“백스물다섯이요?”

“아직 어린 짐승이지. 내 신수로 키우는 중이야.”

“어린 짐승, 신수.”

소녀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처음 본 그 모습은 위장이야. 아직 어리지만 그 정도 위장이면 인간을 물리칠 정도는 되니까. 너도 봤잖아.”

“네, 보았죠.”

“그리고 랑이는 네가 맘에 드나 봐. 처음 만난 인간에게 머리부터 들이밀다니. 조금 질투 나는 걸.”

백귀가 어렴풋이 미소 지었다.

소녀는 그 얼굴을 보고 넋을 놓을 뻔하였다.

“자, 이제 네 이야기를 들어볼까?”

“아, 제 이야기요.”

소녀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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