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윤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잃었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왜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사라지셨 거든요.”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대답 없는 어머니를 하염없이 불렀을 때였는지,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에겐 꽃이 한 송이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는지, 텃밭을 가꾸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때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어머니-.”
막 잠에서 깨어난 아홉 살 윤희는 방에서 나와 어머니를 찾았다.
부엌일을 하다가도 딸이 눈을 뜨면 어떻게 알았는지 방으로 돌아와 잠이 다 깰 때까지 항상 곁을 지켜 주던 어머니였다.
“어머니-.”
대답이 없다.
어쩌면 집안일이 고단해 부엌에서 깜박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근래에 들어 부쩍 기운이 없고 쉽게 지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윤희는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갔다.
밥상보가 덮인 작은 밥상만 덩그러니 부뚜막 위에 놓였다.
“어디 가셨나?”
저를 혼자 두고, 더군다나 말도 없이 집을 비울 어머니가 아니었기에 뒷마당에 있는 작은 고방에도 가 보았다.
땔나무만 잔뜩 쌓였다.
다시 앞마당으로 나오기 위해 발을 옮기는데, 걷는 걸음걸음이 가볍다.
어머니가 말하길, 소녀는 몸의 중심에 있는 명문이 막혀 기가 돌지 않으므로 속이 답답하고 몸이 무겁다고 했다.
때문에 윤희는 체기를 항상 달고 살았는데, 그것이 희미하고 허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윤희는 싸리문 밖으로 나가 길 이쪽저쪽을 살폈다.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윤희는 좁은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를 기다렸다.
꼬르륵.
부엌에 차려진 작은 밥상으로 눈이 굴렀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어머니가 오시면 같이 먹을래.’
윤희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좁은 툇마루가 윤희에게는 충분히 넓었다.
팔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피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어머니가 몸이 약한 탓에 윤희도 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이렇게 몸이 가벼운 날은 한 달에 하루뿐이었는데, 어머니가 치료해 주는 날이었다.
치료라고 해서 거창한 의술은 아니고 기가 잘 통하도록 어루만져 주는 것이 다였다.
그러면 그날 하루는 몸이 개운하여 윤희의 기분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처마 끝을 가만히 바라보다 옆으로 돌아 누웠다.
이번에는 반쯤 열어둔 성긴 싸리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꼬르륵.
뱃속에서 우렁차게 울렸다.
윤희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 밥상 앞에 섰다.
‘밥상을 차려 놓았다는 건 어머니가 늦게 오신다는 뜻이겠지.’
윤희는 밥상을 들고 조심조심 밖으로 나왔다.
툇마루에 앉아 밥상보를 걷고 숟갈로 크게 쌀밥을 퍼먹었다.
찬으로는 호박전을 간장에 살짝 찍어 먹었다.
어느 정도 허기를 채우고 나니 학당에서 글 외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어머니가 오실 때까지 나도 글을 읽어야겠어.’
윤희는 아버지의 반대로 학당에는 다니지 못했으나,
대신 그런 딸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에게 매일 조금씩 글자를 배웠다.
그 덕에 지금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윤희는 그릇에 남은 밥을 싹싹 긁어 입 안에 쑤셔 넣고 재빨리 상을 치웠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가 한쪽 구석에 놓인 옷궤에서 책을 꺼냈다.
책상에 앉아 어제 읽던 곳을 찾기 위해 책장을 팔락 팔락 넘겼다.
먹과 종이 냄새만 나던 책에서 꽃향기가 살랑 날아와 코 끝에 닿았다.
‘왜 꽃향기가 나지?’
다시 책장을 넘겼다.
이번에는 조금 더 짙은 향이 퍼졌다.
윤희는 책등을 잡고 책장을 촤르륵 넘겼다.
그러다 어느 부분이 되자 책장이 딱 멈추었다.
‘이게 뭐지? 책갈피인가?’
윤희가 고개를 갸웃하고 작은 천 조각을 손에 들었다.
그 작은 조각천이 향기의 출처였다.
그림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힌 조각천을 코에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에 어머니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어머니가 입을 열자 익숙한 음성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이국의 말인가?’
‘어머니의 목소리였어. 응? 어머니의 목소리였다고?’
윤희는 헐레벌떡 방문을 열고 나갔다.
“어머니, 오셨어요?”
툇마루에 서서 마당과 부엌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윤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조각천의 향기를 맡았다.
폐까지 향기가 들어찰 정도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귓가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맴돌았다.
‘향기를 맡으면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려.’
‘주술 같은 건가?’
손에 든 조각천을 유심히 살폈으나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순간 윤희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불현듯 스쳤다.
어머니에겐 꽃이 한 송이밖에 없었다.
고개 숙인 꽃 한 송이.
그 꽃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마른 꽃잎 하나.
불안이 밀려왔다.
윤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나 한 번 떠오른 그 생각은 윤희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제 없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흐아앙.
제 입에서 나온 제 목소리를 듣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손수건에 코를 풀었다.
훌쩍, 훌쩍.
방 안을 떠돌던 향기가 불쑥 코로 들어왔다.
윤희는 펼쳐진 책을 덮고 남은 향을 몽땅 코로 들이마셨다.
그러자 호흡과 함께 마음도 차근히 가라앉았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을 때만 꺼내 봐야겠어.’
기특한 윤희는 책상 위에 놓인 책을 품에 꼭 안았다가 다시 옷궤에 넣었다.
윤희는 툇마루에 나와 앉았다.
그리고 마당 한쪽 구석에 어머니가 일군 작은 텃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가 오지 않아 가물 때에도 시든 잎 하나 없이 파릇파릇하고 언제나 싱싱한 열매를 열어주는 고마운 채소들이었다.
윤희는 그것에 이끌려 텃밭 앞으로 가 섰다.
성긴 울타리 너머로 앞집의 텃밭이 엿보였다.
그 밭의 채소들은 비쩍 말라 누레진 잎을 달고 있었다.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다르지?’
이쪽저쪽 번갈아 보아도 소녀로선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그때 웬 노파가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걸었다.
“혼자 있냐?”
“누구세요?”
윤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다가오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 아무도 없어?”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비는 산에 갔을 테고, 네 어미는 어디에 있냐?”
노파는 제 할 말만 했다.
“아버지가 산에 간 것은 어찌 아세요?”
“그건 네가 알 거 없다.”
윤희는 노파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보는 게냐.”
“할머니가 누구시기에 제 부모를 찾는지 궁금하여 보았습니다.”
“네 어미와 얽힌 연을 풀러 왔다.”
윤희는 노파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 없는 게로구나.”
윤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앗. 어린 아이나 혼자인 사람을 노리는 범죄가 늘었으니 절대 혼자 있지 말고 낯선 자와 말도 섞지 말라고 아버지가 신신당부하였는데.’
태평하던 소녀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흘끔흘끔 쳐다보자 노파는 인상을 찌푸렸다.
“네 어미는 선아, 아비는 정호가 아니냐.”
“맞습니다. 맞긴 한데…….”
“목이 타는구나. 물이나 한 잔 다오.”
“예, 물은 드릴게요.”
윤희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부엌에 들어가 물을 한 바가지 떠 왔다.
노파는 큰 바가지에 담긴 물을 싹 비웠다.
“아이고, 다리야. 먼 길 왔더니 팔, 다리, 어깨, 무릎 안 쑤신 데가 없구나. 어디 앉을자리는 없냐?”
윤희가 잠시 망설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는 사람 같기는 한데, 어쩌지? 그렇지만 아버지가…….’
“아이고, 죽겠다.”
노파가 들으라는 듯 크게 앓는 소리를 냈다.
윤희는 결국 싸리문을 열고 노파를 마당 안으로 들였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이고-.!”
노파가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툇마루에 털썩 앉았다.
“제 부모를 어찌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아, 글쎄, 네 어미와 연이 있다 하지 않았어!”
노파가 버럭 성을 냈다.
윤희가 번쩍 뜨인 두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성질 고약한 할머니가 어머니와 무슨 연이 있다는 거지?’
윤희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노파를 관찰했다.
“할머니, 진짜 할머니 맞아요?”
“아니 그럼 가짜 할머니도 있냐?”
“이상하다…….”
윤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노파도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소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뭐가 다른지 설명해 보거라.”
“그게…….”
윤희가 대답하길 망설였다.
“빨리 설명해 보래도.”
노파가 언성을 높였다.
“하, 할머니는 꽃이 안 보입니다.”
놀란 소녀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꽃? 무슨 꽃이 말이냐?”
노파가 눈을 부릅 떴다.
“그러니까 여기에 꽃이 두 송이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소녀가 명치를 가리켰다.
“그 꽃이 언제부터 보이더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원래 치료하는 날에만 보였는데 어째선지 오늘도 보였습니다.”
“어디가 아프냐?”
“어디가 아픈 건 아니고, 날 때부터 몸이 약해 한 달에 한 번씩 어머니가 치료해 주셨어요.”
“어떤 치료를 해 주더냐?”
노파가 꼬치꼬치 캐물었다.
“기가 잘 통하도록 어루만지는 거라 하였습니다.”
윤희는 이렇게 순순히 다 대답해 주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혹시 네 어미의 꽃도 보았느냐?”
노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보았어요.”
윤희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럼 그 꽃이 어떠하더냐?”
“고개 숙인 꽃에 꽃잎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한 발 늦어 버렸어.”
노파가 질끈 감은 눈을 뜨며 작게 중얼거렸다.
“네?”
“아무것도 아니다. 이만 가 봐야겠구나.”
노파가 자리에서 느긋이 일어났다.
그리고 탐탁지 않은 얼굴로 윤희에게 붓을 건넸다.
“옛다. 네 아비 모르게 숨겨두거라. 쓸 일이 있을 게다.”
붓촉은 희고 윤기가 흘렀으며 검은 대나무 붓대는 매끈한 것이 소녀가 보아도 귀한 붓이었다.
윤희는 기꺼우면서도 무용하다 생각했다.
붓만으로는 글을 쓸 수 없으니 말이다.
“아이고, 팔이야.”
윤희가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노파는 또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당장은 쓸 모가 없어도 언젠가 쓸 일이 생긴데도! 주면 주는 대로 받을 것이지 뭘 이리 꾸물대!”
노파가 제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버럭 성을 냈다.
‘윽, 성질 정말 고약하네.’
윤희는 움츠려든 어깨를 펴고 두 손으로 공손히 붓을 건네받았다.
“이렇게 좋은 붓을 제가 받아도 될까요?”
노파는 딴 데를 보고 넣어 두라는 듯 손을 휘적였다.
“감사합니다.”
소녀가 꾸벅 인사한 뒤 고개를 들자 노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윤희가 툇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텃밭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버지 정호가 돌아왔다.
평소보다 이른 귀가였다.
“나 왔어.”
“일찍 오셨네요, 아버지.”
“오늘은 일찍 끝내고 왔다. 별일 없었냐?”
윤희는 낮에 만난 할머니에 대해 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아버지, 낮에 어떤 할머니가 찾아왔어요.”
“할머니?”
“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 뭐라던?”
“어머니를 찾았는데, 연을 풀러 왔다고 했어요.”
“연을 푼다고?”
“네, 근데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윤희가 두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뭐, 됐다. 그 할머니는 어떻게 생겼더냐?”
“음-.”
윤희는 허공을 응시하며 생김새를 떠올리려 애썼으나, 신기하게도 노파의 얼굴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 저 기억이 안 나요.”
윤희가 의기소침해졌다.
“됐다. 중한 용건이면 다시 찾아오겠지. 네 엄마는…….”
갑자기 정호가 입을 다물었다.
딸에게는 나중에 천천히 설명하려고 되도록 말을 아끼자 다짐하고 집에 왔건만, 웬 할머니가 부인을 찾았다는 말에 실수를 해 버렸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단어에 윤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 네 엄마는.”
“알아요. 좋은 곳으로 가신 거죠?”
아홉 살 윤희가 대견하게 말했다.
“그래. 알고 있었냐?”
“어제가 보름이었잖아요.”
“그래, 보름이었지. 백귀가 나타난다는 보름.”
“어머니가 백귀는 좋은 신이라고 했어요.”
“맞다. 네 엄마가 그랬다면 맞는 말이다.”
정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윤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꾸나.”
정호는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윤희에게 부채를 넘겼다.
“불 좀 보고 있어라. 물을 길어 오마.”
윤희는 부채를 건네받고 아궁이 앞에 앉았다.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제 몸을 불태웠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머니와 그것이 운명이라는 듯 심상히 받아들이는 아버지와 나.
부채를 부치지 않아도 아궁이 속 불이 활활 타올랐다.
부엌에 산들바람이 불었다.
윤희는 가만히, 가만히 타오르는 장작만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가 하마.”
어느새 길어온 물을 물동이에 붓고 부엌으로 아버지가 들어왔다.
“오늘은 대충 짠지랑 먹자꾸나. 네 엄마 있을 때처럼은.”
정호가 또 말을 멈추었다.
“네, 오늘은 간단하게 먹어요.”
윤희가 구태여 밝게 말했다.
“큼, 가서 방문이나 열어라.”
정호가 헛기침을 하며 간단히 차린 밥상을 번쩍 들어 옮겼다.
둘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먼저 밥을 다 먹은 정호는 자리에 앉아 윤희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미안하구나. 팔자 사나운 아비를 만나 네가 어미를 잃었어.”
윤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억세고 투박하기만 하던 아버지가 어쩐지 풀 죽어 보였다.
“분명 사정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윤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럼, 그렇고 말고.”
정호가 옷소매로 윤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알고 있었어요?”
윤희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그러자 정호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네 할머니가 무녀 아니냐, 내가 외로운 팔자라더라.”
윤희가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정호는 입을 꽉 다문채로 시선을 피했다.
다음 날 새벽, 정호는 여느 때와 같이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부엌으로 가 주먹밥을 만들었다.
‘밥은 이만하면 됐고.’
정호는 소반에 준비한 딸아이의 밥과 대나무 도시락에 담긴 자기 몫의 주먹밥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주먹밥을 하나 집어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산에 갔지만, 역시 혼자 두면 안 되겠어. 웬 할머니도 찾아왔었다고 하니.’
남은 주먹밥은 소반 위에 놓인 딸아이의 밥 옆에 나란히 올려 두고 밥상보를 덮었다.
그리고 부엌 앞에 세워 두었던 지게를 다시 고방에 던져 넣고 방으로 들어가 도로 누웠다.
그날 이후 정호는 여러 날동안 산에 오르지 않았다.
아직 어린 딸을 집에 혼자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웃에 종일 맡기자니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염려되었고, 산에 데리고 가자니 몸이 약한 아이가 더 병이 나진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마냥 집에서 아이만 돌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래도 저래도 정호의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아이의 옷은 더러워지고 머리도 점점 헝클어져 갔다.
정호가 일을 쉰 지 사흘 째 저녁이었다.
“전에 학당에 다니고 싶다고 했지?”
“네, 학당에 다니고 싶어요.”
윤희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그럼 네가 다닐 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보마.”
윤희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 윤희를 보고 정호는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허탈하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부인이 사라진 뒤로 딸아이의 건강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좋아졌다.
모르긴 몰라도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호는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장 씨 부인, 계시오?”
정호는 두 집 건너 이웃의 장 씨 집에 찾아갔다.
“서 씨가 날 다 찾고, 웬일이래?”
“뭣 좀 물어봅시다.”
정호는 딸 셋을 키워 시집보낸 장 씨 부인에게 딸을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다.
“애 엄마는 어디 가고?”
“그게, 폐병이 난 건지 어쩐 건지 슬슬 아프기 시작하더니 급히 떠나버렸지 뭐요.”
“아이고 저런, 장례는 치렀고?”
“둘이 조용히 보냈소.”
“아휴, 약해 보이더라니.”
대충 둘러댄 정호의 말에 부인은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말인데, 산에 갔다 오는 동안 애 봐줄 사람을 찾고 있소.”
“아유, 내가 돌봐 줄 테니 염려 마시우. 몸도 약한 애를 혼자 둘 수 없지.”
“고맙구려.”
정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학당에 보내려고 하는데.”
“학당에 갈 기력은 있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으니 괜찮을 거요.”
“그렇다면 잘 생각했소. 이제 여자라고 해서 살림만 살아서는 안 되거든.”
장 씨 부인이 정호의 의견에 반색했다.
“우리 딸들은 학당에 안 보내줬다고 아직도 날 원망해. 그때가 언젠데.”
장 씨 부인이 세 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처음에는 귀 기울여 듣던 정호도 그녀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에는 울타리 밖에 서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바쁜 사람을 잡아두고 있었네.”
“괜찮소. 들어 두면 딸 키우는데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정호는 장 씨 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학당을 알아보러 간다며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며칠 뒤, 윤희가 학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정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아무래도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장 씨 부인이 어련히 알아서 돌봐주지 않겠냐만은, 그래도 부모가 직접 돌보는 것과는 다를 터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뜻을 흔쾌히 따라주는 윤희가 참으로 기특했다.
기특하긴 마을 아낙들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몸이 약해 집에만 있던 윤희였다.
그런 아이가 몰라 보게 건강해진 데다 이제는 학당까지 다닌다고 한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급작스러운 변화였지만 그저 대견하다 여겼다.
제 어미를 닮아 어여쁜 윤희가 이제는 뽀얘진 얼굴로 길을 걸으면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낙들이 주전부리를 건네주기도 하고, 그런 것이 없다면 말이라도 한마디씩 걸어 아이가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
“학당에 가는 길이냐.”
“예, 아주머니.”
“옛다, 공부하다 출출하거든 혼자 몰래 먹어라.”
“감사합니다.”
활짝 웃는 윤희의 얼굴을 보고 빨래터에 가던 아낙 셋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유, 이쁘기도 하지.”
“저 어린것이 어미를 잃고도 저렇게 씩씩하네.”
“차암, 기특해-.”
“서 씨가 한 시름 놨겠어.”
“왜 아니겠어. 누워 있는 애 맡기는 거보다야 훨씬 마음이 편하겠지.”
“그럼-, 장 씨 부인이 도맡아 봐준다고 했으니, 아주 잘 됐지.”
“장 씨도 좋은 일 하네그려.”
“그나저나 어떻게 저렇게 건강해졌나 몰라.”
아낙들은 멀어지는 윤희를 보며 쑥덕거렸다.
윤희의 귀에 다 들리는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