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46분 KTX를 타고 해 뜨는 걸 보면서 세종시로 향한다. 연수 장소는 코트야드바이 메리어트 세종 호텔. 오송역에서 택시를 타고 늦지 않게 도착했다. 빡빡한 일정, 하루 종일 강의를 듣는 일은 정말 고된 일이다. 강의를 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든 강의를 듣는 일. 질문과 토론 없이 수동적으로 들으며 내용 전달을 받는 형태의 교육이나 강의는 역시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를 번갈아 마신다. 다행히 평소 친분이 있는 좋은 분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생각을 짬짬이 나눌 수 있어서 그나마 다른 참석자들 보다는 더 유연한 분위기로 첫째 날을 보낼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같은 테이블 참석자분들과 세종호수공원 밤산책에 나섰다. 꼼짝없이 묶여있던 몸에 새 힘이 돌고 청량한 밤공기에 머리가 맑아진다. 비가 내렸는지 보도는 촉촉하게 젖어있고 물기를 머금은 대기가 오감을 깨운다. 상쾌한 바람에 사람들의 발걸음마저 경쾌하다.
조금 걷다 보니 겨울을 맞아 색동옷을 챙겨 입은 키 큰 소나무들이 나타난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들과 물 위에 비친 건물의 불빛들이 고된 하루의 선물처럼 아름답다. 오송역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할 때는 뭐 저런 알록달록한 천으로 나무를 둘러놓았나 싶었는데 조명빛과 선명한 색깔이 어우러지니 그저 곱고 산뜻하여 좋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다. 반짝이는 노란 전구가 우리들의 마음인양 정겹다. 세종호수공원 호수의 물은 3미터나 된단다. 우리 동네 잔잔한 호수와는 전혀 다르다. 너무 깊다. 어서 수영을 배워야지 생각하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눈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오늘은 강도 높은 연수를 받았지만 깔끔한 룸과 낭만적인 호수공원 밤산책을 즐길 수 있으니 더없이 좋다. 이렇게 낯선 곳에서 한 해를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 어찌 보면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다 싶다.
조금 걷다가 비를 맞고 있는 소녀상을 발견하고 다가가 본다. 누가 이리 살뜰하게 모자며 목도리 털양말을 짜서 입히고 신겼을까? 추운 겨울 덜 추울 거 같아 다행이다 생각하며 소녀상의 앳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모습이 흡사 땀 같기도 하고 지금 막 흘린 눈물 같기도 하다. 우리는 말없이 소녀상을 바라본다.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로 잠시 멈추고 고요함이 흐른다.
너무 어리다. 너무......
한강 작가는 글을 쓰면서 마음속에 두 가지 의문을 품었다고 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을까?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을까?
이후에 이 질문을 앞 뒤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도 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
요즘의 사태를 바라보며 한강 작가의 이 말이 자꾸 마음속에 떠오른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넓은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접는다. 2019 개정 누리과정 연수 때에도 세종시에 와서 연수를 받았다. 시간이 흘러 다시 2025년 유보통합을 목전에 두고 교육부·전국 시도교육청이 주최하고 육아정책연구소가 수행하는 시울시교육청 '개정 표준보육과정(0~2세) 연수에 참가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교육부 산하로 영유아교육기관이 들어가게 되면 분명 아이들에게 이로울 것을 믿는다.
서로의 일정이 바빠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이런 기회로 반가운 얼굴들을 다시 보는 기쁨이 크다. 교육이 끝나면 삼삼오오 전국에서 선발된 영유아 교육 전문가들이 영유아들이 어떻게 하면 즐겁게 잘 배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이다.
나라 사정을 지켜보며 나에게는 중요한 이 연수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하였다. 무사히 교육을 받고 겨울비를 맞으며 걷는 호수 산책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행복하다. 제대로 된 정치는 나의 작은 일상을 평온하게 흘러갈 수 있게 한다.
요즘은 시(詩)도 잠시 쉬고 한 해의 업무 마무리에 힘을 쏟고 있다. 12월 말쯤부터 마음 한 편으로는 겨울 동안 마음 깊이 묻어 둔 이야기들을 꺼내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내듯 글을 쓰고 싶다. 가장 나에게 몰입할 수 있는 일 두 가지를 꼽으라면 산책과 글쓰기이다.
이번 1박 2일 연수에 참여한 사람은 200명. 그중 28명이 1인실의 행운을 가져갔다. 나도 스물여덟 번째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 고요하고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안락한 1인 객실에서 올해도 부지런히 달려온 나에게 토닥토닥 위로를 건넨다.
침대 옆에 호텔로고가 인쇄된 메모지와 펜이 보인다.
내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본다.
그 안에 소설이 있다.
시작하고 마침내 어느 날인가 완성한다면 그날도 고요한 마음으로 호숫가를 산책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