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
동쪽 하늘부터 조금씩 어둠이 옅어지기 시작한다.
'오늘은 꼭 나가야지.'
따뜻한 이브자리를 애써 빠져나와 써야 할 글을 마무리한다. 3시간 30분 정도 땀 흘리며 써 내려간 글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꼬르륵 배가 고프다. 때마침 옆지기가 달큼한 겨울 당근을 듬뿍 넣고 말아 주신 김밥과 따끈한 청국장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서둘러 옷도 가장 따뜻한 차림으로 준비하고 집을 나선다.
평소 같으면 겨울 호숫가 언저리를 산책하거나 동네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편안하고 고요한 삶을 살고 있을 시각 나의 발은 두툼한 양말에 털부츠를 신고 지하철 계단을 바삐 내려간다. 종로 3가까지 3호선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내리는 사람은 소수이고 계속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에 탄다. 5호선으로 환승하는 구간에서 사람들은 다 많이 모였고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줄을 서서 여의도 방향 5호선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질서 정연하게 역내에 모여있을 수 있구나.'
시간이 좀 더 걸리지만 나는 계단을 이용하여 이동한다. 혼잡을 조금이라도 분산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여의도 방향 지하철은 민주시민으로서 목소리를 직접 내고자 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찬다. 특히, 2030 여성들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밀지 말아 주세요."
"다음 열차를 타 주세요."
"아이고야. 많이 탔어요."
위험을 느낀 사람들은 듣는 사람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정중함을 담고 있다. 나이 많은 어른들도 타고 계셨는데 이리저리 밀고 밀리는 열차 안에서 '아이고야', '허허'등의 짧은 말로 힘듦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혼잡함이 조금씩 밀도가 더해졌다. 시민들은 억지로 밀고 붙여 타는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혼잡한 곳에 배치된 역무원과 경찰관들의 안내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이러한 행동들이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내릴까? 양보해 주고 싶다'
무엇이 이 불편함을 감당하면서까지 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가?
사람들은 친절하고 이성적이었지만 단단하고 간절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열차는 내리기도 쉽지 않은 몇 구간을 빠르게 달렸다. 나는 여의나루역에서 내려 여의도 공원 쪽으로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이동한다.
형형 색색의 응원봉이 음악에 맞춰 춤추는 곳
차가운 바닥에 앉아 열정적으로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
통로를 확보하여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람들
개성 넘치는 응원도구들과 재치 있는 문구들을 읽으며 이동한다.
잠시 음악이 멈추고 국회 탄핵 투표 결과가 발표된다.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
시민들은 환호하며 응원봉을 흔든다.
서로 부둥켜안은 여학생들
발을 구르며 환호하는 가족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이 든 부부
다시 음악이 흐르고 눈물 젖은 눈동자는 무지갯빛 밝은 빛의 물결 속에 더욱 반짝인다.
나는 빠르게 걸을 수도 없어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누리는 평온한 일상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 목숨 걸고 지켜낸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에 진 빚은 우리가 조금씩 갚아나가야 한다.
다리가 아파 집에서 쉬고 있던 언니가 혼자서 여의도까지 왔다. 언니를 만나야 한다. 언니와 통화하고 여의도공원관리사무소 앞에서 만나기로 한다. 우리가 움직일 테니 그곳에서 기다리라 말하고 사람들의 흐름을 타며 조금씩 이동하였다. 이동하면서도 감격 어린 시민들의 얼굴과 춤사위를 마주할 때마다 함께 춤춘다. 마침내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나를 보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역사의 현장에서 언제나 내편인 언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감격스럽다.
"언니, 울어?"
"아니야, 눈에 찬바람이 들어가서 그래."
"맘껏 울어도 돼. 오늘은."
"이거 선물이에요. 기념으로 가지세요."
언니는 눈물을 반짝이며 웃는다. 옆지기는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다가 조금 전에 구입한 파란색 하트가 눈부시게 빛나는 응원봉을 언니에 건넨다. 언니가 활짝 웃는다. 우리는 함께 본무대를 향해 걸었다. 국회에서 나온 국회의원들이 본 무대에서 인사말을 한다. 쌀쌀한 바람에 정당의 깃발뿐 아니라 재치 넘치는 문구를 담은 깃발이 너울 거린다.
여의나루역 지하철 역사로 들어가는 줄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우리는 사무실이 운집한 곳으로 들어가 부대찌개 전문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그 동네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와 와플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다. 약속 없이 만나서 더욱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우리 동네로 들어오니 단지마다 입구를 색깔 전구로 장식하여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마음이 포근해진다. 오늘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역사는 가장 보통의 사람들의 목소리로 변화한다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한강 작가가 5.18 자료들을 읽으며 인간성에 대한 회의가 느껴져 소설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박용준 열사가 일기장에 쓴 이 한 문장이 '소년이 온다'를 완성하게 만든 힘이 되었다고 하였다. 오늘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의 마음을 담은 것 같아 고개 끄덕이며 마음에 담는다.
2024년 12월 14일 여의도를 걸으며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제 작은 산을 넘은 것이지만 오늘은 잠시 편안하게 꿀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고요하게 호숫가를 걸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