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걷기 좋은 길 하면 어디가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한강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 타는 길도 좋고 북한산 둘레길처럼 산을 끼고 도는 길도 좋지만 저는 옛 철길의 낭만과 젊은이들의 활기찬 발걸음과 조금만 걸으면 버스킹 하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는 홍대 즈음의 경의선 숲길을 좋아합니다.
인근에서 볼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지인 한 분과 경의선 숲길을 따라 홍대입구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온갖 풀꽃이 만발하고 무엇보다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오월, 코끝에 스치는 향긋한 장미향이 바람과 함께 밀려오고 밀려갑니다. 도심에서도 자연은 늘 기분 좋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
요즘은 날씨가 참 이상합니다. 아침녁엔 제법 서늘하지만 낮엔 따가운 햇살이 쏟아집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힙니다. 오월인데도 오후의 햇살이 여름 한가운데 있는 것만 같아요.
기찻길 옆에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기찻길을 따라 자그마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옛날 집 바로 그 사람들이 여기서 가게를 열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장사를 하여 잘 살아간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지금은 주인이 모두 바뀌어 젊은 사장들이 젊은이의 감각에 맞춘 가게들을 열어 사람들을 손짓합니다.
좀 엉뚱한 상상이지만 안개가 드리운 날에 따뜻한 전구 불빛이 반짝이는 경의선 숲길을 걷노라면 작은 가게들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먹방가게들을 연상시킵니다.
"여기는 수제 맥주집인가 봐요."
"맥주 한 잔 하고 갈까요?"
우리의 눈길을 잡는 가게는 공원 쪽을 향해 오픈된 데크공간에 테이블을 내어 놓은 집입니다. 아직 밝은데도 다정한 느낌이 나는 전구를 켜놓아 주변의 초록빛 나무들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마실까요?”
“저는 과일향이 나는 것이 좋더라고요.”
“아 그래요? 저는 맥주랑 다른 것이 섞인 것보다 맥주 본연의 맛을 잘 살린 것이 좋아요.”
누가 보면 저 사람 술 좀 하나 보네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술 한잔에 얼굴이 온통 빨개지는지라 술을 잘 마시지 않아요. 시골집에 가면 삼겹살에 아버지가 말아주시는 소맥을 먹을 때만 한 잔에서 조금 더 먹는 정도입니다.
“저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해요. 그동안 익숙했던 일을 접고 새로운 걸 하려니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기대도 많이 돼요.”
“그래요? 저는 그 말에 좀 놀랐어요. 하지만 좋아하는 길을 가는 것,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기로 했다는 거 참 멋져요. 새로운 도전 축하합니다.”
“이것이 축하받을 일일까요?”
“당연하지요.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직업으로서 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를 가장 나답게 하고 밥벌이에 기여하고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하지만 같은 일을 오래 하면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습관처럼 일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성장점을 찾고 내 마음속에 가보고 싶었던 길에 대해서 잘 들여다보고 진중하게 생각해 보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내가 현재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체 한다면 나는 나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내가 새로운 길로 들어서면 현재 쥐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마음 졸이며 꼭 필요한 결심도 유보하게 됩니다. 경의선 숲길 수제 맥주집에 앉아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나는 이럴 때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이럴 때 이런 느낌이 듭니다.’
편안하게 나의 생각과 감정을 내놓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삶이 건강합니다. 어른이 되면 내면에 간직한 얼굴과 겉으로 보이는 얼굴을 달리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가끔 내 마음의 맨 얼굴을 내놓아도 좋을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참 편안합니다.
“저기 보세요. 고양이예요.”
“고양이가 배를 드러내고 누웠어요.”
“저건 완전히 너를 믿는다는 신호인데 산책하는 사람들과 아주 친한가 봐요.”
고양이가 산책하는 주민들과 장난을 치고 놉니다. 한두 번 놀아본 것이 아닌 듯 친근합니다. 가벼운 차림으로 달리는 사람, 수업이 끝나고 학교에서 나온 대학생들, 퇴근하는 사람들이 숲길을 걸어갑니다.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바로 우리 테이블 옆으로 말이지요.
멋진 인생은 뭐 그리 대단한 계획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녁을 먹고 가족과 함께 나서는 동네산책, 아무 날도 아닌 날에 부모님 댁에 가서 함께 상추쌈에 된장국이 놓인 소박한 밥상 앞에 마주 앉는 일, 남편과 퇴근시간을 맞춰서 함께 장을 보고 그 장바구니를 함께 들고 오는 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여 나의 일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공간에서 내 가난한 요리 솜씨로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일, 아이들에게 좋은 사회를 살아갈 수 있게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일......
저는 어느 날엔가 저 혼자라도 경의선 숲길의 수제맥주집에 드를 것 같습니다. 비가 내리는 여름날이거나 눈 내리는 겨울일 수도 있겠습니다. 좋은 생각이 마구 일어나는 장소는 또 가게 되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