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於此彼)
학기 말, 모든 시험이 끝나고 방학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이들은 저에게 "오늘 뭐해요?"라며 물어요. 곧장 저는 당연하다는 듯 "공부해야지!"라고 대답해요. 그러니 아이들의 원성이 자자한 것 있죠? "어차피 시험도 끝났는데, 오늘은 놀아요!"
2026년 3월부터 교실에서 스마트 기기 사용이 제한돼요. 모르셨던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까지는 교실에서 스마트 기기 사용이 가능했거든요. 그렇다고 휴대폰만 보는 자유 시간을 줄 수가 없어요. 집에서도 매일 휴대폰을 손에 쥐며 시간을 보낼 텐데 교실에서까지 그렇게 보내게 두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KBS 다큐 - 인재전쟁 1부 공대에 미친 중국'의 영상을 틀어주기로 해요. 과학기술 주도권을 두고 총칼 없는 전쟁이 벌이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패권 경쟁을 치열한데, 중국의 AI 기술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중국의 인재들은 대부분 공대로 향한다는 점을 영상을 통해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들도 이 영상을 꼭 한 번은 보기를 추천드려요.
우리는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거나,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어차피'라는 어휘 카드를 꺼내게 됩니다. 약간의 체념이라 쿨한 인정이 담겨 있다고나 할까요. 어감만 들으면 '어차피~'하고 늘어지는 우리말 같지만, 사실은 아주 팽팽한 대결의 구도를 가진 한자어입니다.
어차피 (於此彼)
於 (어조사 어): ~에 있어서, ~에서
此 (이 차): 이것, 가까운 쪽
彼 (저 피): 저것, 먼 쪽
글자 그대로 풀어 해석하면 '이것(此)과 저것(彼)에 있어서(於)'라는 뜻이 되지요. 즉, '이쪽이든 저쪽이든' 혹은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라는 뜻이 '어차피 (於此彼)'가 되었습니다.
왜 ‘어차피’일까?
우리는 흔히 인생을 '선택의 연속'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조상들이 보기에도 세상 일은 늘 두 갈래 길이었습니다. '이것(此)'을 선택했을 때의 득실과, '저것(彼)'을 선택했을 때의 리스크를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죠. 그런데 '어차피'는 그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이것(此)을 고르나 저것(彼)을 고르나 결과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오는 결론이 되어버리지요. 그럼에도 단순한 포기의 단어가 아니라, 수없이 오가며 치열하게 고민해 본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단어가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말로 '이판사판(理判事判)'이 있죠? 원래 불교 용어에서 유래했는데, '막다른 데 이르러 어쩔 수 없는 지경'을 뜻하게 된 말이에요. '어차피' 또한 '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매한가지니, 결과에 순응하겠다'는 치열한 고민 속 묘한 달관의 정서가 담겨 있달까.
이것도 알아두면 꿀잼!
‘어차피’의 ‘피(彼)’는 쓰이는 곳이 생각보다 많아요.
차일피일(此日彼日): 이 날(此) 저 날(彼) 하며 기한을 미룸.
지피지기(知彼知己): 적의 사정(彼)과 나의 사정을 자세히 앎.
결국 ‘어차피’는 이 날(此)과 저 날(彼) 사이에서 방황을 끝내고 내리는 마침표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매일 아침 베어 무는 아삭한 사과(沙果).
"사과가 한자어였다고?"라며 놀라기엔 아직 이릅니다. 사과라는 이름 속에 '모래(沙)'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다음 장에서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