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甚至於)
유난히 기운이 빠지고 축 처지는 그런 날들이 있지 않나요. 열심히 손세탁한 니트가 물에 젖어 축 처지는 것처럼, 늘어지거나 늘어지고 싶은 그런 날들이요. 저번 주가 저는 딱 그런 날이었어요. 저번 주에는 제 생일이 있어서 생일날이 다가오기를 고대하기도 전에 여러 업무들에 치이느라 밤을 새우는 날이 부지기수였거든요. 생기부 마감을 해야 해서 몇 날 며칠을 고심하며 한 명씩 1500바이트의 글을 총 100여 명 학생들의 생기부로 써 내려갔어요. 심지어 집필하고 있던 교재가 있었는데 저번 주까지 탈고를 했어야만 해서 새벽에 잔잔한 재즈 음악을 듣고는 있었지만 마음은 초조한 상태로 탈고를 해야만 했고요. 추가로 중국어 인강 촬영을 앞두고 있어서 커리큘럼 및 강의 콘셉트, 그리고 교안까지 작성해야 했어요. 밤을 꼴딱 새울 수밖에 없는 일정들이었던 거죠.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어찌어찌 업무를 하나씩 해 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컴퓨터가 뻑이 간 거 있죠. 열심히 만들고 있던 강의 교안이 모조리 날아간 거예요. 아뿔싸- 심지어 컴퓨터까지 말썽이었던 거죠.
이렇게 무언가 잘 안 풀릴 때면 저는 달달한 디저트를 먹는 게 최고랄까. '생일에는 달달한 케이크를 원 없이 먹을 테다'라고 다짐을 했던 거죠. 달달한 케이크와 와인이라면 오늘 있었던 속상함과 허무함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려요.
어떤 상황이 더 극단으로 치달을 때, 우리는 '심지어'라는 어휘 카드를 꺼냅니다. '더욱이'나 '게다가'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고 느껴져요. 왠지 우리말 느낌이 강해서 '심지어'를 한자어라고 생각하지 못한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놀랍게도 이 단어는 글자 하나하나가 모여 완성된 '한 문장'이라는 사실!
심지어 (甚至於)
甚 (심할 심): 심하다, 대단하다
至 (이를 지): 이르다, 도달하다
於 (어조사 어): ~에, ~까지
여기서 '어(於)'는 전치사의 역할을 하는데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심함(甚)이 ~에(於) 이르렀다(至)'라는 뜻이 된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부사로 많이 쓰이는데요. 한문으로 접근해 보자면 완전한 문장이 된다는 거예요. '심함이 ~에 이르렀다.' 재미있지 않나요?
왜 '심지어'일까?
단순히 '심하다'라는 형용사가 아니라, '그 심한 정도가 여기까지 도달했다'는 동작과 방향이 담긴 말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심지어 비까지 오네?'라고 말한다면, 상황이 나빠지고 나빠지다가 결국 비가 오는 최악의 단계까지 도달했다는 의미처럼요. 우리가 이 단어를 쓸 때 느껴지는 묘한 긴장감이나 압박감은 바로 '도달할 지(至)'자의 힘에서 나와요.
이것도 알아두면 꿀잼!
우리가 화가 났을 때 쓰는 '심하다'와 '심각하다'에도 같은 '심할 심(甚)'자가 들어갑니다.
심(甚)하다: 정도가 지나치다.
심각하다: 심할 정도로(甚) 깊게 새겨져(刻) 있다.
'심지어'는 정도가 심하다의 결정체랄까요. 앞으로 이 단어를 쓸 때는 '아, 상황이 갈 데까지 갔구나!'하고 한자의 깊은 울림을 경험해 보세요.
포기하고 싶을 때 습관적으로 쓰는 이 말. '어차피'가 사실 '이것(此)'과 '저것(彼)' 사이에서 고민하던 우리 조상들의 치열한 흔적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다음 장에서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