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언제 멈출지 몰라도 영원히 달릴 것처럼

<<나의 첫 환자는 나였다>> 에필로그

by 저삶의

새롭진 않지만 사실인 두 가지 문장이 있다.


“삶이 생각한 대로만 되진 않는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풀코스 마라톤을 뛰어 본 적은 없지만, 다만 집 앞 강변을 1시간 달릴 때도 변수는 생긴다.

하늘이 조금 흐렸을 뿐인데 어느새 단순 우중충에서 우중런(비 맞으며 달리기)이 되어 있기도 하고,

저녁에 뛰어보고 시원해서 다음 날에도 나갔는데 열대야로 더위 먹을 뻔 하기도 한다.

날씨 뿐만이 아니다.

러닝크루를 계속해서 마주치는 날도 있고 전동 자전거가 도보로 쌩 하고 오기도 한다.


뇌수막종 진단도 받고, 커리어는 불안정해지고 미래는 알 수 없으며, 가까운 사람들 몇 명도 여러 사건을 겪은 한 지난 1년 반.


마치 푹푹 찌는 날에 뛰다 보니 소나기가 들이붓고, 길은 좁은데 러닝크루로는 모자라 무수한 전동 자전거 라이딩 크루가 앞뒤로 신나게 달려 오는 통에 걸핏하면 진흙길로 피해야 하는데 집은 아직 20km나 남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이러면서 계속 뛸 바에는 길에 나가서 택시라도 잡고 싶다. 결제수단을 찾으려고 러닝 밴드를 뒤져보는데, 미친! 유일한 결제수단인 핸드폰이 비를 맞아 맛이 갔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계속 뛰거나, 그대로 길 옆 강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무릎이 쑤시기 시작하고 허벅지 뒤쪽의 햄스트링은 김밥 옆구리처럼 터질 것 같다.

그냥 급류를 뚫고 집까지 수영하는 건 어떨까?


어조를 한번 급하게 바꿔 보자면,

나는 이런 상황에서 강에 뛰어들거나 길에 드러눕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뇌종양 진단을 받기 전에는 존엄성이고 뭐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그리고 먹기 위해 살았는데.

의도하지 않았지만 죽음이나 뇌 손상, 후천적 장애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하게 됐고,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심연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철학이란게 생겼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언제 멈출지 모른다는 걸 인지한 상태로 마치 영원히 달려갈 것처럼 한 발 씩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언제든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죽거나 크게 다쳐 장애가 생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안다.

“아, 그러면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까 오늘 마음껏 먹고 마시고 돈 쓰고 감성주점에서 추파도 던져보고 오토바이 음주운전도 해봐야지!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안 돼! 한국말은 미괄식이라서 끝까지 들어야 한다.


내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는 더욱 정진하기 위한 동력이 돼야 한다.

내가 짧은 인생에서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 지금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 다른 말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활동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배우자와 맛있고 독창적인 음식 만들어 먹기.

둘째, 뇌를 건강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여러 자기돌봄 활동들 (달리기, 마음챙김 명상, 노래 연습 등).

셋째, 의학과 관련된 공부, 독서, 글쓰기.


언제 못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런 일들에 하루하루 집중한다.

마치 영원히 할 수 있을 것처럼 길게는 10년, 20년의 계획도 생각해 가면서.


1부 부록에서 나는 뇌종양이 없는 사람에 비해 뇌 손상을 입을 확률이 아주 조금 높다고 썼다.

그런데 그 사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뇌 관련된 병명이라 하면 뇌종양이나 뇌동맥류 같은 구조적 문제, 뇌졸중이나 뇌출혈같은 혈관 문제, 우울증이나 ADHD 같은 정신 질환 (다른 말로 뇌세포의 대사기능 부전)이 있다.


그런데 이런 병이 없는 ‘멀쩡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뇌 기능이 떨어지거나 뇌 손상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손쉽게는 술이나 초가공식품 같은 중독성 물질을 흡입할 수 있다.

잠을 줄이거나 틈만 나면 쇼츠를 보는 등, 물질의 도움 없이 스트레스 호르몬을 높이고 전두엽 기능을 떨어뜨리는 것도 가능하다.

매일 정제 탄수화물을 배불리 먹은 다음 누워서 유튜브를 시청하는 습관을 들여 조금씩 뇌 혈관과 신경세포의 기능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이렇게 뇌를 혹사시키며 살다 보면 언젠가 뇌에 영향을 주는 병을 진단받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뇌에 직접 관련된 병명이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뇌 활동에 지장을 주는 질병이 엄청나게 많다.

뇌로의 전이가 이루어지는 각종 암들, 뇌세포의 대사를 방해하는 당뇨, 뇌출혈 위험을 높이는 고혈압, 뇌에 산소 공급이 잘 되지 않는 호흡기 질환들, 뇌로 들어가는 자극에 영향을 주는 시각이나 청각 관련 질환 등등.


그러다 보니, 무증상 양성 뇌종양에 위치도 수술하기 어렵지 않고 뚜렷한 크기 변화도 없는 상태인 내가

남들에 비해 특별히 뇌가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나중에 개두술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지만, 평소에 뇌를 깨끗하고 건강하게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나와 비슷한 질병과 습관을 가진 환자 A와,

진단 받은 질환이 없지만 뇌에 도움 되지 않는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B가 있다고 하자.

둘 중에 누가 더 건강하게 살아갈지 골라서 100만원을 투자하라면 나는 A를 고르겠다.

혹시 이 선택이 틀린 걸로 밝혀진다 해도, A 입장에선 뇌에 도움 되는 생활 습관을 유지하는 게 최선 아닐까?




나의 첫 환자는 나였다.


이 환자는 의대생이기도 하다.

자기 상태에 대해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으며, 의학적 증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특성은 생활 습관 처방에 대한 큰 저항감 없이 적극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이 환자를 매일 추적 관찰하고 상담하며 지금 상태에서 최선의 건강과 삶의 질을 유지하도록 돕겠다.

뇌 수술을 하게 된다면 그 과정을 무사히 거치고 일상에 돌아올 수 있는 체력과 뇌가소성을 확보하도록 언제나 옆에서 같이 뛰겠다.


몇 년 후 의사가 되어 다른 환자를 만날 때도, 환자로서의 정체성을 항상 가운 한 켠에 품고 다니겠다.

그리고 의사이기 전에 건강 관리 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본보기가 되고 싶다.

keyword
이전 23화3-6. 파이어족이라는 꿈과 헤어질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