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을 바꾸면 삶이 달라진다
"너는 참 일을 쉽게 해. 그게 그렇게 쉬워? "쉽게 쉽게 할 건 다하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잠깐 생각에 잠겨 '내가 쉽게 한다고?' 사람들은 왜 내가 일을 쉽게 한다고 보고 있을까? 사실 나는 부족한 게 많고, 어설프기 그지없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도 꽤 많다. 그런데 남들의 눈에는 뭔가를 '쉽게' 해 보이나 보다.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장 잘 쓰는 단어가 '무리하지 말고'이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말끝마다 "무리하지 말고"를 붙인다. 공부도 무리하지 말고, 운동도 무리하지 말고, 일도 무리하지 말고, 관계도 무리하지 말고...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한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즐겁게 하고, 못하는 것은 깨끗이 인정하고 잘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가며 기쁘게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잘 못하는 것에 미련을 두고 부족함을 자책하지 않음과 잘못 저지른 일에 대해선 빨리 인정하고 반성하는 습관이 생겼다. 좋고 나쁘고, 잘하고 잘 못하고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인 것이다.
원래 나는 고집쟁이였다. 약간 도톰한 입술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화가 나서 입을 앙 다물면 입이 툭 튀어나와 보인다. 나는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이런 독특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래서 나의 화난 표정은 '툭 튀어나온 앙 다문 입' 이였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그 입을 풀 줄 알게 되었지만, 앙 다무는 방법밖에 몰랐던 시절이 꽤 길었던 것 같다. '툭 튀어나온 앙 다문 입'은 어떻게 풀어졌을까?
어린 시절 나는 동네에서 또래 어린이 중 가장 키가 컸었다. 학교에서도 키 순서대로 짝을 짓던 시절이니 짝 은 늘 없었다. 아동복은 맞는 게 없어 항상 바지는 껑충 발목 위로 올라가 있고, 스웨터의 팔은 짧았다. 마른 체형이었음에도 키 사이즈를 맞추기 위해 가장 큰 사이즈의 체육복을 헐렁하게 입어야 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어른 사이즈의 크고, 아동복 사이즈의 작고, 짧은 옷을 입는 게 아닌 걸치고 다녀야 하는 게 정말로 창피했다. 이런한 이유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 그렇게 입을 앙 다문 채로 살았던 것 같다.
우리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일을 하고 계시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가정주부들처럼 소소하고 세세한 걸 챙기는 성격도 아니고 시간적 여유도 항상 없다. 그러나 정말로 창의적인 사람인 건 분명하다. 무수히 많은 비화가 있지만, 그중 내가 몸이 아파 유치원에 못 갈 때가 있었다. 그때 정말 큰 고무대야를 사다가 거실에 툭 드려놓더니 그 안에 국자 등 다양한 조리기구를 넣어주셨다. 이유인즉슨 심심할 때 그 안에 들어가서 오빠와 우주선 놀이를 하라고도 했다. 또 큰 키 때문에 내복이 말려 올라가 양말 안으로 내복을 넣을 수 없어 불편하다고 징징대니 똑같은 내복을 두 벌 사다가 다리를 잘라 이어붙여 길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구두가 맘에 안 든다고 하면 에나멜 구두 위에 매직 펜으로 그림을 그려 주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 백설공주 드레스가 유행을 했었다. 우리는 그 드레스가 너무 입고 싶어서 각자의 엄마에게 드레스를 사달라고 졸랐다. 친구들은 다 사 입었는데, 나만 또 사이즈가 없어 외톨이였다. 나의 키로 인해 억울했던 감정은 그때 터졌던 것 같다. 엉엉 울고 불며, 키를 작게 만들겠다고 밥도 안 먹고, 목을 짧게 어깨에 넣어보는 등 혼자서 궁리를 하며 속앓이를 했었다. 정말 죽기보다 싫은 게 나의 큰 키였다. 그때 엄마는 백설공주 드레스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보라색 드레스를 맞춰왔다. 나는 그 드레스를 보자마자 오히려 더 열불이 나서 납다 울며 "그게 아니라고! 그렇게 생긴게 아니란 말이야!" 너무 속이 상해서 엉엉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의 돌아오는 말은 "너는 신데렐라를 해!. 신데렐라가 훨씬 더 이뻐. 그리고 이 드레스는 네 사이즈에 맞춘 거라 너만 입을 수 있어" 그러는 것이었다. '나만 입을 수 있다고? 내 사이즈라고?' 나는 엄마의 그 말을' 너는 너야, 너한테 맞추면 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내 사이즈에 꼭 맞는 바지를 입을 수 있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치마를 고집했다. 바지가 짧으면 치마를 입으면 되는 거였다. 짧은 바지에 나를 꾸겨 넣고 창피해 하며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게 그때였던 것 같다.
나의 엄마는 우리 남매에게 도시락을 싸 준 적이 없는 엄마다. 화통한 성격의 바깥일을 즐겼던 엄마는 당신의 삶이 그럭저럭 행복했던 것 같다. 도시락은, 음식을 더 잘하는 할머니가 해 주시면 된다고 각자의 할 일을 나눠서 생각했던 것 같다. 심지어 비 오는 날 학교로 우산 한번 갖다 준 적이 없었다. 형형색색의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다른 엄마들을 보며 울적했던 적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덕에 오빠와 나는 비를 맞으며 집에 오는 길에 빗물 찬 웅덩이에서 물 놀이를 많이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비를 맞는 것이 차가움과 불편함이 아닌 나를 빗물에 적셔도 되는 공식적인 자유로움 이란 걸 알게 해줬다. 그렇게 오빠와 나에게 현실적 불편함을 주며 양육했던 엄마였지만, 앙 다문 내 입이 왜 나와있는지는 아는 엄마였다. 그럼에도 내 엄마는 지금도 자신이 부족한 엄마였다고 기억한다. 그래서 늘 미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꿈을 키울 수 있게 해준 엄마로 기억한다.
만일, 우리 엄마가 일하며 가정, 육아에도 완벽을 추구하려 무리를 했다면 엄마는 불행했을 가능성이 높고 불행한 엄마를 보고자란 오빠와 나도 행복을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없어 삶의 기준을 내가 해 낼 수 있는 수준보다 높게 잡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엄마에게 말해준다. 나의 존재를 이기기 위해 무리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걸 알게 해준 나에겐 적합한 엄마였다고.
살다 보니, 무리한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자신을 몰아치치 않아도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