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에 따라 상황은 달리 보인다.
가족.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품.
‘따뜻한 가족’ 하면, 드라마 1988의 '덕선이네 집'이 떠오른다. 반지하에 세 들어 살지만 정이 있고 각자 스스럼없이 감정 표현하며 당당하게 사는 가족이다. 반면, 그와 전혀 반대의 가족을 그려냈던 드라마 '킬미힐미'의 주인공은 어릴 적 부모에게 학대받은 트라우마로 인해 다중인격을 보인다. 가족 간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감정 억압의 기운을 배우들의 표정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드라마가 나오는 것은 이것도 우리 삶의 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감을 불어넣어 세상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게 힘이 되어주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겉으로는 풍족해 보여도 불안함과 두려움에서 서로가 벗어나지 못하는 가족이 있다.
품어주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는 가족의 이중성은 어떻게 하면 청산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대물림’되는 가족 내의 정서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재능 있는 사람을 보면 타고났다고 한다. 그처럼 가족의 정서도 대물림되어 가족에 전해진다. 우울증, 불안, 트라우마가 대물림되기도 한다. 애정 욕구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아이에게 과도한 관심과 간섭으로 과잉보호를 하면 그 아이는 더욱 큰 결핍을 갖게 된다. 이처럼 대물림된 정서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다양한 형태로 작용한다. 그러다 보니 사랑해야 할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집착이 억압으로 표출되어 결국은 서로를 거부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는 본인의 자세와 관점에 따라 가족의 악순환적 정서가 그대로 대물림될 수도 있고, 대물림의 악순환이 끊어지는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가족 내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은 생각의 폭이 아주 좁다. 왜냐하면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감 때문에 시야를 넓힐수록 불안이 증폭되므로 현실을 회피하고 점점 자기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물림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불안과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고통과 불행의 의미를 찾는 것은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출발점이 된다. 부모가 대물림해준 인생이 아닌, 자기가 주인인 자기 인생 말이다. 초대하지 않은 불쾌한 사람이 내 집에 불쑥 들어오면 나가라고 내쫓을 수 있으면서, 내 마음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내 것이 아닌 나쁜 감정은 왜 받아들이는지? 심지어 왜 그 감정에 휘둘리기까지 하는 건지? 그 감정이 찾아왔을 때 가만히 멈추고 생각해 보자. " 이 감정은 뭘까? 어디서 온 걸까?"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고통을 경험한 독일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외적인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라고 말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왜 받는지를 모른다.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주는 것은 돈, 명예 등의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트라우마나 해결되지 않은 내면의 문제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을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게 성숙이다.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자신을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리 보인다. 그림 감상도 원근법에 따라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감상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한 폭의 그림으로 생각하고 감상해 보면 어떨까? 내 그림의 상처 있는 부분이 너무 깊고 넓은가? 그러면 멀리 떨어져서 그림 전체를 감상해 보자. 어떤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그림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어보자 — 이 작품의 주인은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