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주고도 못 사는 시간이 공짜?
“누구와 혹은 무엇하며 시간을 보내세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해본다. 이 질문의 시작은 만날 수 없는 보고 싶은 이가 자주 생각나면서였다. 어떤 날은 유난히 보고 싶다. 심지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다. 연락 끊긴 어린 시절 친구, 멀리 살아 만나기 쉽지 않은 지인들 그리고 먼저 떠난 분들과 반려견도 있다. 그들과의 좋았던 시간이 그리웠던 것 같다.
연락이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은 아린 가슴으로 느껴진다. 사랑이 뭔 줄 어렴풋이 알게 된 지금 만났더라면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사랑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시간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아껴 쓰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그래서 남들은 이 아까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을 우리가 처음 접하는 시기는 이 말의 깊은 의미까지 알 수 있는 시기는 아닌듯하다. 어린 시절에는 '남아도는 게 시간인데?' 하고 철 없이 넘겼던 말이, 남은 시간이 점점 짧아질수록 시간은 정말 ‘금’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평하지 않은 세상일이 많다고 해도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인생이나 인간관계가 달라지기도 한다. 정말 좋은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시간도 사람도 소중한지 몰랐을 때는 여기저기 시간을 얇게 퍼뜨려 쓰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지금은 관계를 소중하게 만들어 가려고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성숙해지지 않을 때는 그 시간이 아깝게 다가오기도 한다. 무조건적으로 성숙한 관계가 목적은 아니었음에도 아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사람은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라 몸이 반응함은 물론 그만의 냄새를 풍긴다. 하물며 정신적으로는 어떨까? 어떤 경험과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행동 그리고 말의 표현과 내용도 달라진다. 이것이 성숙해진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회현상이나 다양한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 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면 이는 성숙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시간을 쓰면서도 사고의 성장은 멈춘 채로 나이만 들어가고 있다면 외골수, 고집쟁이, 자기가 만든 작을 골방에 갇혀 고약한 냄새만 피우는 격일 수도 있다. 물론 현재 나의 모양새가 그럴 수도 있기에 열심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묻는다. “나의 행동이나 생각이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진 않나요?”
분명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사람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고와 상황만을 주장하며 그 안에 가두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중년 이후에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 사람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어떤 고민을 하며 자기 성찰에 얼마의 시간을 할애하는가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것의 중요함도 몰랐던 젊은 시절 나에게 시간은 그저 무한하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에게 주어져있는 24시간을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가 그 사람을 형성한다는 것을 깨달으니 시간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다. 하물며 내게 남은 시간은 20년 전보다 훨씬 더 짧아지고 있으니 그 소중함의 크기는 더 하다
의도치 않아도 내 귀에 들려오는 닫혀있는 부정적인 말들을 들으며 시간을 허비하느니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도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것일 뿐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이로울 수 있겠단 생각을 해 본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에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어 진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인색하게 쓰고 싶지 않다. 이렇듯 사랑도 시간에 비례하는데 유흥, 험담, 거짓된 일, 무의미한 일, 부정적인 사람과의 만남 등에 시간을 쏟아붓고 있다면 그것들에 비례하는 시간 후에는 무엇이 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