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터득해야 하는 것
주말 산책. 한강을 걸었다. 시원한 바람이 코 끝에 닿더니 강 냄새가 스쳤다. 흠....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예상치 못했던 터라 우산도 없고, 일단 한강 편의점 앞 파라솔로 뛰어갔다. 주말 아침부터 난감했다. 이미 옷은 다 젖었고, 금세 그칠 비는 아닌 것 않고... 배는 고프고. 비를 맞아 추운데, 배까지 고프니 처량하게 느껴졌다.
더 걸을 수도,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이 빗속에 남겨진 나. 일단 배를 채워야겠다 싶어 편의점에 들어갔다. 라면을 하나 사서 먹다 보니 맛이 일품이었다. 아무도 없는 주말 아침에 빗소리를 들으며 한강에서 먹는 라면은 혼자여도 괜찮았다. 라면을 다 먹을 즈음에 이 순간이 아쉽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즐겨볼까?'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가 맥주 한 캔과 감자칩 한 봉지를 샀다. 돈을 가지고 나오지 못했지만 다행히 핸드폰의 카카오페이 기능이 제 몫을 해 주었다. 준비 없이 다가온 상황에서도 살아갈 방법은 있다더니 오늘 같은 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어쨌든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잔잔한 한강, 그리고 거칠게 쳐대는 빗줄기였지만 이 상황을 만드는 모든 것이 나와 함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아침의 적막함과 난처함을 낭만으로 바꿔준 먹다 남은 라면 국물과 감자칩 그리고 맥주 한 캔이 주는 위로는 대단했다.
알딸딸한 취기가 오르자 공황장애를 겪고 있던 유명인의 인터뷰 기사 한마디가 떠올랐다.
"열심히 살았는데 어느 순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겠고, 왔던 길을 거슬러 되돌아 가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그게 공황장애가 돼버렸죠"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던 최승자의 시가 떠올려지기도 하고. 오늘 같은 날을 경험하고 나니 '오도 가도 못하는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다가왔다.
살다 보면 정말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크고 높은 파도가 인생에 몰려온다. 순간 생각한다. '도망가 버릴까?' 그 생각 위로 또 다른 생각이 올라온다 '발이 이미 바다에 묶였는데 도망갈 힘이 있어야 가지' 그러면 그 위로 또 생각이 올라온다. ' 나를 곧 파도가 삼켜버리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어진다. 우리는 삶의 고난에서 맞닥뜨린 문제들 앞에서 힘을 주고 최선을 다해서 몸으로 막아내려 한다. 하지만 힘겨루기는 수준이 비슷한 대상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힘겨루기로 될 턱이 없다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가 힘을 겨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빨리 마음을 접고 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파도타기를 하든지 장대비가 멈출 때까지 비를 피하는 수밖에 없다. 인생의 파도를 타려면 힘을 빼는 법을 연마해야 하고 그 시간은 비로소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힘을 빼는 것인데, 이 또한 자신을 알면 자기에게 맞는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열심히 살다가는 이리저리 부딪혀 뜻을 세우기도 전에 기진맥진하게 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뭘 잘하는지 어떤 점이 취약한지도 모른 채 남들이 하는 대로 열정만 갖고 산다면 준비 없이 링 위에 올라선 권투선수와 다를 바 없다. 경기가 안 끝났으니 링 밖으로 나갈 수도, 경기에 온전히 임할 수도 없이 살아간다면 얼마나 힘들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을 때 사람은 당황한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다면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가려는 어리석은 노력은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