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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 Oct 17. 2023

잊을 뻔 했다

11일차

 웬만해선 햇빛을 볼 일이 없는 나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코로나 잠복기를 고려한 관찰 기간과 이론 교육 기간이 이어져 입소 후 11일이 된 지금까지도 훈련병들은 체력단련 이외에는 모든 훈련을 실내에서 받았다. 햇빛을 보며 사는 삶! 언뜻 듣기로는 매우 희망찬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이는 오히려 절망적인 삶을 의미한다. 때는 5월 말, 여름의 초입에서 조금씩 뜨거워지는 햇볕과 올라가는 기온을 첨단 과학(에어컨)의 보호 없이 견뎌야 한다는 소리였다.


 고마운 비가 오는 날에는 그럭저럭 견딜만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날에는 점호와 체력단련을 실시하는 이른 아침부터 더웠다. 날씨뿐 아니라 앞으로 받게 될 교육의 난이도 역시 상황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이는데 한몫했다. 중요도로 따지자면 지금까지 해온 교육과 앞으로 받아야 할 교육에 차등을 둘 수는 없겠지만 훈련병 및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교육은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다. 사격, 수류탄, 각개전투, 행군.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과목들이 남은 3주에 몰려있었다. 그러나 나는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군생활에서 기원한 말 중에 ‘짬’이라는 말이 있다. 군에서 먹는 밥을 속어로 ‘짬’이라고 하는데 ‘짬 좀 먹었다.’ , ‘짬이 찼다.’ 같은 식으로 응용하여 사용한다. 짬 좀 먹었다는 건 그만큼 군 생활을 길게 했다는 뜻이라 이 표현은 ‘요령이 생겼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된다. 고작 10일, 그것도 훈련소 생활이라지만 짬을 좀 먹어서인지 처음에 들던 괜한 불안감이나 걱정은 많이 사라졌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머릿속에서 정확히 나누고, 할 수 없는 것은 일단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자는 태도가 생겼다. 결론은 '남은 실내 교육 기간이나 즐기자.'였다.


 오늘은 정훈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정훈교육은 이념 또는 사상교육의 일환이다. 대한민국 군인의 적이 누구인지를 규정하고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의만 놓고 보면 매우 딱딱하고 강압적인 교육일 것 같지만, 교육은 상당히 일반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 위주로 진행되었다. 교육이라기보다는 사기진작과 동기부여를 위한 자리 같았다. '국가로부터 주어지는 보호와 여러 기회들이 있는 만큼 군 복무를 통해 국가에 기여할 의무도 있다.', '군대가 시간을 뺏는 것은 사실이지만 허락된 자유 시간에 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군생활을 그동안의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기회로 삼아라.', '이왕 온 것 국가를 위해, 자신을 위해 열심히 복무하자.' 대충 이런 내용을 골자로 교육이 이뤄졌다.


 사실 교육보다도 훈련병들의 사기진작과 동기부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교육 전후로 틀어준 유행곡이었다. 교육 전 자리를 정돈하는 동안 강의실에는 장범준의 노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가 나오고 있었다. 너를 바라보고 기다리고 그리워한다는 가사가 이곳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남자들만 가득한 이곳에 연애감정을 건드리는 감성적인 가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고로 남자들은 쑥쓰럼을 많이 타서 연애 얘기를 해도 감성적으로 하지 않는다. 감성 발라드를 좋아하지만 노래방에서나 부르지 남자들끼리의 대화는 기본적으로 쿨하고 딱딱하다. 본지 얼마 안 된 사이에서는 더하다. 연애가 주제라면 어떻게 만났고 뭐 하는 사람이고 몇 년 사귀었는지 말하면 대충 얘기가 끝난다. 노래 가사처럼 그 사이에 숨은 더 중요한 내용들은 각자 짐작해야 하는 영역이 된다. 술 한잔 했을 때면 모를까 쉽게 꺼내는 얘기가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던 차에 오랜만에 감성적인 노래를 들으니 사회에 있던 때가 떠올랐다. 나는 이런 것 참 좋아하는 사람인데 싶었다.


 교육이 끝난 후에는 여자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두 개 틀어주었다. 아이돌 문화나 춤에 워낙에 무지해서 사회에 있을 때는 잘 찾아보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여자 아이돌이 갖는 지위는 사회와 전혀 달랐다. 독립적인 자아를 강조하는 노래, 그룹 ITZY의 <WANNABE>와 지금 이 순간이 축제의 순간이니 즐기라는 노래, 그룹 IZONE의 <FIESTA> 뮤직비디오를 입대 후 가장 높은 집중력으로 시청했다.


 10일 만에 처음 듣는 상큼한 이성의 목소리와 아름다운 외양이 나의 집중력의 원인이었다고 한계 짓지 말아 달라. 영화 <위대한 쇼맨>의 주인공 바넘이 대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던 말처럼, 이런 게 예술이라는 감격에 휩싸여 나는 온 감각을 눈과 귀에 집중했다. 나는 이런 아름다운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임을, 대화 사이에 삶 사이에 숨겨진 솔직한 마음들을 듣고 표현하기를 즐기는 사람임을 떠올렸다. 나는 노래하고 글 쓰는 것은 물론, 가장 약한 부분을 꺼내어 대화하기도 즐기는 사람이다. 아, 하마터만 잊을 뻔했다.


 내가 원하는 만큼만 변화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로 살아가는 동안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오래 생각해 왔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먹이려 하셨지만 싫어했던 마늘과 고추를 언제부터 내가 먼저 찾게 되었는지, 온갖 역경을 겪어온 사람들을 좋아하다가 구김살 없이 맑은 사람들에게 언제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지, 모두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변화 이후를 더 긍정적이라고 느낀다면 굳이 '언제'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옛 꿈같은 것이 떠오를 때, 언제 잊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때는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상실이 당황스레 슬퍼지는 것이다.


 앞으로 변화할 나 만큼이나 지금껏 변화해 온 지금의 나 역시 소중하다. 지금 먹은 마음이 더 소중하게 될지, 나중에 먹게 될 마음이 더 중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어제와 내일의 나를 마주 세워두고 꾸준히 대화시키며 오늘의 나를 움직이는 것이다. 누구도 섭섭하지 않게. 짬을 먹는 건 좋지만 너무 맛있게 먹다간 군인답지 않게 살이 찌고 말 테니까 말이다.


 오늘 교육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교육대장쯤 되어 대장 명찰을 달면 뭐가 필요한지를 정확히 아는구먼.' 드라마에서 봤을 법한 사장 말투에 빙의하여 마음속으로 교육대장을 칭찬했다. 마음에 여유가 조금씩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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