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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 Oct 16. 2023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10일차

 입대를 준비하는 그대여, 지금 당장 달리기를 시작하라. 입대일이 한 달 이상 남은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예비 군인의 통념에 어긋난다. 입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사람에게 다이어트는 사치에 가깝다. 다이어트에 도움을 주는 모든 운동들 역시 사치스러운 행위로 여겨진다. 훈련소에 가면 자연스럽게 빠질 살을 굳이 미리 노력해서 뺄 사람은 없다. 아무리 운동을 좋아해서 헬스가 인생의 낙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지만, 그들도 근육운동을 즐길 뿐 유산소를 즐기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그랬다.


 입대 전 한 달간 나는 먹고 마시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부족한 탄수화물 보충을 위해 몸을 속인다는 의미의 치팅데이를 갖는다고 한다. 나는 입대 전에는 원래 이렇게 사는 거라 합리화하며 뇌를 속이는 의미의 치팅데이를 매일 가졌다. 남들은 일주일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회식 스케일의 식사를 반복했다. 삼겹살, 마라샹궈, 치킨, 햄버거 등 내가 좋아하는 음식의 맛을 혀에 각인시켰다. 맥주와 탄산음료는 이 모든 음식을 무리 없이 위장으로 넘겨주는 보조제였다. 이런 생활을 즐기는 방탕한 사람이 운동을 할 리가 없었다. 삼일에 한 번씩은 하던 홈 트레이닝도 포기했다. 처음에는 잘 버텨주는 듯하던 나의 체중은 임계점을 넘어간 후로는 꾸준히 증가해서 한 달간 7kg이 늘었다. 명백히 비만 기준을 초과한 상황이었다. 훈련소에 가면 다 빠진다는 친구들의 말을 든든한 버팀목 삼던 나날이었다.


 결과적으로 친구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훈련소에 입소한 후 2주도 안돼서 체중은 급감했다. 처음에는 맛이 적응이 안돼서 잘 먹지 못해 살이 빠졌고, 잘 먹게 된 이후에는 매일같이 진행되는 체력단련으로 살이 빠졌다. 그러나 그 과정이 보통 험난하지 않았기에 나는 제-발 조금이라도 몸을 단련해서 입대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훈련병은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핑계를 절대로 댈 수 없다. 진짜 죽는다 싶지 않으면 해야 한다.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 할 수 있을 때까지 보충한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면 정당하게 항의하겠지만 체력이 기준치에 미달되는 것은 내 이성이 보기에도 한심한 일이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훈련소에서는 2번에 걸쳐 체력검정을 한다. 체력검정은 팔 굽혀 펴기와 윗몸일으키기, 3km 달리기 세 가지 종목으로 구성되어있다. 나는 나름대로 옷맵시에 신경을 쓰던 사람이라 상체 운동만은 자신 있게 해 왔기에 팔 굽혀 펴기, 윗몸일으키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달리기는 근육운동 전 워밍업을 위해 뛰던 10분 이상을 뛰어본 적이 없다. 버스를 놓칠까 달리는 일이 일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달리기였다. 이처럼 게으른 직장인에게 3km를 쉬지 않고 뛰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15분 정도 되는 시간 안에 그 거리를 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안 온다면 러닝머신을 떠올리면 된다. 시속 12km의 속도로 15분간 달려야 완주가 가능한 코스다. 나에게 시속 12km는 10분의 워밍업 시간 중 1분 정도 빠르게 뛸 때의 속도였다. 훈련병들의 이런 사정을 다 알고 있는 훈련소는 매일 아침마다 3km씩 의무적으로 달릴 기회를 마련해준다. 군가도 불러가며 발맞추어 신나게 뛰며 단련할 환경을 제공한다. 얼마나 친절한지, 여러분도 꼭 경험해보았으면 한다.


 오늘은 1차 체력검정을 실시하는 날이었다. 1차는 중간 점검의 개념으로 성적에 기록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준을 만족하지 못할 경우 보충 체력 단련을 실시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본 게임보다 나은 점이라면 달리기 한정으로 3km가 아닌 1.5km를 뛴다는 것이었다. 물론 기준 시간은 절반으로 짧아지지만 거리에 비례해서 줄여주는 것 자체가 큰 배려였다. 보통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기록이 떨어지기 때문에 1.5km는 페이스를 유지하며 참고 뛰어볼 만한 거리였다.


 750m를 뛰어 반환점을 찍고 다시 750m를 뛰어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선두에는 체력 특급 기준에 페이스를 맞춰 뛰는 조교가 있었고 후미에는 낙제 기준에 페이스를 맞춰 뛰는 조교가 있었다. 나의 목표는 낙제를 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미를 지키는 조교를 꾸준히 살피며 선두로부터 3분의 2 지점 정도를 유지했다. 반환점에 이르기까지는 꽤 여유로운 레이스였다. 숨이 찼지만 버틸 만했다. 그런데 반환점을 돌고 주변에 함께 뛰는 사람들이 줄어들며 겨우 몸을 이끌던 정신력이 뚝 떨어졌다. 옆에 누가 있으면 힘을 낼 수 있었지만 혼자서 고독한 레이스를 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숨을 가다듬기 위해 잠깐 걷는다는 게 길어지며 나를 제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마침내 후미를 지키는 조교가 내 옆에 섰다. 조교의 “야, 뛰어!” 한 마디에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발을 떼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코스는 오직 조교의 다그침에 쫓기는 레이스였다. 따라오라는 소리에 의지해 풀려가는 다리에 힘을 줬다. 헥헥거리며 뛰고 있는 동안 초등학생 때 형과 농담처럼 주고받던 윤동주의 시가 떠올랐다. 심부름을 같이 갈 때나, 뭔가 뛰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뭣도 모르고 함께 복창하던 시 <또 다른 고향>이었다. 그중에서 마지막 연을 외워서 서로 깔깔거리며 소리치곤 했다. 어린 나이부터 시를 외웠으니 기특하다고 생각해야 할지, 누군가의 깊은 성찰이 담긴 시를 유머 소재로 사용했으니 불경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시 어린 때의 유쾌한 기분으로 시구를 중얼거렸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이 순간 느꼈던 나의 감동이 나눌 수 있는 것인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정말 왈칵 울어버릴 것 같은 벅찬 감정을 느꼈다. "형, 나 쫓기는 사람처럼 뛰고 있어. 평생 해본 적 없는 달리기를 죽어라 하고 있어. 뭔가로부터 열심히 도망가고 있는 느낌이야." 라고 형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숨이 턱까지 찬 채로 나는 나에게 물었다. 지금 떠나야 할 고향이 어디인지, 새로 찾을 또 다른 고향은 어디인지. 그런 게 없는데 지금 이 달리기가 이토록 서러울 리가 없었다.  


 시의 화자가 도망친 고향은 이미 망가진 고향이다. 화자는 안주하려는 자신을 꾸짖으며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고 말하고 있다. 망가진 고향은 관성을 가진다. 내가 누웠던 보금자리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고 그리운 냄새 또한 그대로 남아있다. 쉽게 떠날 수 없는 편한 곳이다. 떠나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고 싶을 만큼 편안함이 주는 유혹이 큰 장소이다.


 그 당시 나는 뭔가를 이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약사 자격증까지 땄으니 도전할 것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쌓아둔 지식을 조금씩 팔아가며 살면 된다는 마음이 한편에 숨어 있었다. 반쯤 완성시켜 놓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평생에 걸쳐 성장해야 한다는 다짐 틈새에 자라기 시작한 이 생각은 어느 날 보니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며 자라나 가장 커다란 생각이 되어 있었다. 달리기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자마자 내가 얼마나 나약하게 변했는지 느껴졌다. 나는 거기서 도망치고 있었다. 나약해진 정신력을 다시 깨우라고 꾸짖으며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작 1.5km를 얼굴이 다 창백해져서 달려놓고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윤동주의 대표작을 읊어가며, 그것도 형과 주고받던 농담이었던 그 시구를 붙들고 울컥하는 장면은 누가 봐도 우스울 장면이었다. 그러나 나는 인생의 한 순간이 어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마음에 큰 파동을 남기는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해묵은 상념으로 점철되어 이제는 찾아서는 안될 고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거창하고 무거운 일들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도전으로 시작될 수 있음을 알았다.


 나는 조교에게 끌려오다시피 해서 겨우 낙제를 면했다. 쉼 없이 산소를 요구하는 폐를 달래느라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심장 역시 금방이라도 터질 듯 격하게 뛰었지만, 기뻤다. 새로 얻은 깨달음 때문이었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보충 체력 단련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행복감이 가장 컸다. 역시, 몸이 편한게 최고다.


 다음 체력 검정 때는 3km를 쉼 없이 뛰어야 했다. '백골 몰래' 조용히 달리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 호흡을 정갈히 하고, 걸음도 가볍게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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