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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 Oct 18. 2023

하늘은 어둡고 우리는 경쾌해

12일차

 실전 야외 훈련을 당장 다음 주로 앞둔 금요일이었다. 3일 뒤 월요일이면 그동안 배웠던 내용을 바탕으로 사격술 시험을 봐야 했다. 월요일에 사격술 시험을 통과하면 화요일에 정상적으로 영점사격(보급받은 총기를 개인에 맞도록 조정하는 것이 목적인 사격)을 하러 갈 수 있고, 영점사격을 바로 통과하는 훈련병들은 그다음 날인 수요일을 통째로 쉬는 파격적인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실거리 표적 사격은 목, 금 이틀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었고 영점사격과 마찬가지로 목요일에 합격하면 금요일에는 휴식이 주어졌다.


 사격 자체는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 아니었다. 재미도 있고 여러 번 쏠수록 눈에 띄게 실력이 늘기 때문에 성취감도 크다. 문제는 사격장까지 단독군장을 하고 걷는 길이었다. 흔히 떠올리는 커다란 배낭을 진 군인의 모습을 완전군장 상태라고 한다. 이 완전군장에서 배낭을 뺀 것 즉, 탄띠와 탄띠에 결합하는 탄알집, 수통, 방탄헬멧, 총기 및 방독면까지만 몸에 휴대하는 군장을 단독군장이라고 한다. 완전군장에 비하면 양반이지만 단독군장만 해도 몸에 매달린 것들의 무게가 15kg는 된다. 그 상태로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길을 한 시간 반 가량 걸어야 했다. 사격장에 도착한 후에도 문제는 있었다. 너무 많은 인원이 한 번에 사격을 하러 가기 때문에 언제 자기 순번이 올지도 모른 채 무한 대기를 해야 했다. 20분 정도의 사격을 위해 사격장을 오가고 대기하며 총 다섯 시간 정도를 소모해야 하는 구조였다. 단계별로 제때 통과하지 못하면 고생길이 훤해진다. 당장 월요일에 있을 사격술 시험부터 온 힘을 다해 합격할 궁리를 해야 했다.

 

 사격술 시험에 포함된 과목은 다양했다. 탄알집 교체, 총기 분해, PRI, 총기 기능고장 시 대처법, 거리별 과녁 조준 법, 영점 조절법, 바둑알 올리고 방아쇠 당기기, 엎드려 총 쏘는 자세 이렇게 8가지 정도의 과목을 통과해야 했다. 부스 형태로 차려진 과목별 시험장을 돌며 시험을 보고, 종합 점수를 집계하는 방식이었따. 대학생 때 과학 캠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때가 생각났다. 어린 학생들이 내가 있는 부스로 오면 간단한 과학 이론을 가르쳐주고 적당한 도움을 주어 과제를 성공시킨 후 스탬프를 찍어주는 일이었다. 그때 그 아이들에게 언젠가 군대에서도 비슷한 것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줬어야 했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적당히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강의실에 모여 교육영상을 시청한 후에는 실제 총기를 가지고 연습을 진행했다. 분해도 직접 해보고 탄알집에 탄알을 장전해보기도 하며(연습 시에는 화약이 없는 탄피를 사용한다.)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동기들은 총기 분해를 특히 즐거워했다. 시험 자체가 시간 내에 총기 분해를 완료하는 것이다 보니 서로 경쟁이 붙어 더 열심히 연습했다. 조준 법, 영점 조절법, 기능 고장 시 대처법 같은 과목은 이론적인 내용이 주여서 암기력이 좋은 친구들이 먼저 외워 다른 친구들을 가르쳤다.

 

 훈련병들의 원성을 가장 많이 산 과목은 PRI였다. PRI는 총을 쏘는 기본자세를 연습하는 과목이다. Preliminary Rifle Instruction의 줄임말로, 사전 총기 교육 정도의 의미이지만 훈련병들에게는 (P)피나고 (R)알배기고 (I)이가 갈리는 시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연병장에 모여 ‘서서 쏴’, ‘엎드려 쏴’, ‘무릎 쏴’, ‘쪼그려 쏴’ 네 개의 자세를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전환하다 보면 무릎과 팔꿈치가 까지고 허리가 아파온다. 땡볕 아래 흙바닥에 구르며 땀과 흙먼지가 섞이는 서러움을 견뎌야 하는 훈련이었다.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잡는데도 조교는 계속해서 자세를 지적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세 훈련이라기보다 체력단련처럼 느껴질 정도로 몸이 쑤셨다. 짜증이 치솟았지만 분명히 도움이 되리라 스스로를 달래며 지시에 순응했다. 훈련병들에게는 어디까지가 정당하고 필요한 교육인지, 어디부터가 과한 지시인지 구별할 경험도 지식도 없었다.

 

 각각의 과목을 숙달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시험의 평가 방식이 훨씬 큰 문제였다. 시험과 평가는 조 단위로 이뤄질 예정이었다. 내가 잘하더라도 다른 조원의 성적이 부진하면 재시험을 봐야 했다. 조원들이 서로 돕고 이끌어주며 최고의 성과를 내기를 기대하며 정한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동기들은 평소 가깝지 않거나 감정이 좋지 않은 동기가 잘 못하면 가르치기보다 다그치기 바빴다. 설상가상으로 잘 못하는 친구들은 계속 지적을 받자 짜증이 나서 열심히 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대학과 함께 드디어 졸업한 줄 알았던 조별과제의 폐해를 다시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7년도 더 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동기들을 달랬다. “다 같이 잘해보자.”, “이미지 트레이닝을 꾸준히 하면 시험 때는 훨씬 잘하게 될 거야.” 과연 잘하게 될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말이라도 희망차게 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다 보니 다들 어느 정도 숙달된 실력을 갖게 되었다. 조금씩 자신감이 붙으니 다들 신이 났다. 조교인 척 근엄하게 지시를 내리고 누가 더 정확한 자세를 취하는지 시합도 해가며 자기 성과를 뽐냈다. 사격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훈련병들도 많아 보였다. 20발을 전부 맞춰 포상 휴가를 받겠다며 아직 쏴 본 적도 없는 총으로 자세를 잡았다. 군대에 가자는 제안은 단칼에 거절하더라도 "총 쏘는 법 배울래? 총기 분해해볼래? 수류탄 던져볼래?" 물어봤으면 졸졸 따라왔을법한 훈련병들이었다. 험난한 전체 과정에도 즐길 거리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소설 <상실의 시대(1987)>에서 비스킷 통에 비유한 인생처럼 모든 과정에는 맛없는 비스킷이 있고, 맛있는 비스킷도 분명히 있다. 매일 시무룩하게 지내던 나도 오늘은 호기로운 훈련병들의 장난에 동참해 함께 웃었다.


 훈련에 몰두하며 흙먼지에 까매진 훈련병들의 얼굴처럼, 하루가 금세 가고 날이 어두워졌다. 오늘은 유난히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날이었다. 땀으로 군복이 다 젖었는데도 오히려 기분이 상쾌했다. 몸 쓸 일 없이 실내에서만 시간을 보내다가 간만에 육체활동을 해서 그런 것인지, 조별로 모여 시끄럽게 떠들며 함께 훈련해서인지 들뜬 마음에 말도 많아졌다. 선선한 바람이 땀에 젖은 군복을 말리며 몸을 감쌌다. 해가 지는 동안 우리 조원들은 그늘에 앉아 생활관 복귀 순서를 기다렸다. 


 하늘은 어둡고 몸은 많이 피로했지만, 우리 훈련병들은 모두 경쾌했다. 아니, 하늘은 어둡고 몸은 피로했고, 우리 훈련병들은 모두 경쾌했다. 오늘의 기분은 ‘그렇지만, 저렇지만’ 같은 말들로 반전을 주어야 드러나는 숨겨진 진실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의 문법 없이도 나란히 찾아오는 기쁨이었다. 각종 생각에 휩싸여 빠져나오기 위해 애써 떠올리는 기쁨이 아니었다. 힘들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을 움직이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고, 마침내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선선한 바람을 느낄 때 느끼는 기쁨이었다.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며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자체로 완벽하고 순수한 기쁨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는 말과도 닮은 점이 있다. 인생이라는 비스킷 통은 '맛없는 비스킷이 있지만, 맛있는 비스킷도 있어.' 라는 말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맛없는 비스킷이 있고, 맛있는 비스킷이 있어.' 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맛없는 비스킷 다음에 맛있는 비스킷이 반드시 나오리라는 법은 없다. 맛없는 비스킷만 연달아 먹게 되는 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인생이 비스킷 통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맛있는 비스킷이 분명히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불행해지지 않는다. 두 상황을 병렬적으로 바라볼 때, 둘 모두 자체로서 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연습을 마치고 총기를 총기함에 넣으며 우리는 서로 잘하자고 격려하고 다짐했다. 배우는 게 더딘 동기 역시 내가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포기할지 전략을 설명하자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면 미리 불행해진다. 그 전에 몸으로 움직이고, 받아들이면 해결될 일들이 많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침울한 훈련소에 즐거운 훈련병들이 각자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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