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심성이 고우며 성품이 올바르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며 대인관계가 원만하다는 것이다. 물론 내 소망 사항이다. 나는 산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산책 예찬론자를 자처하기엔 가진 근거가 빈약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산책의 좋은 점을 여기저기 설파하고 다니곤 했다. 식후 산책이 혈당의 농도를 떨어뜨려 살이 찌는 것을 막아준다든지 복잡한 고민거리가 있을 때 굳이 그걸 생각하며 걷지 않더라도 한 바퀴 동네를 거고 오면 새롭게 생각할 기분이 든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연애를 꿈꾸는 친구들에게는 상대방과 뜬금없더라도 가볍게 정감 가는 산책을 할 것을 권유하곤 했다. 이는 실제 절친한 친구의 경험담에 기반한 권유라는 점에서 권위를 얻기도 했다.
사실 처음부터 산책을 좋아하진 않았다. 나는 밥을 먹고 침대에 바로 눕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하라면 신나서 할 자신이 있다. 좋아하는 음식에 약간의 술을 곁들인 후 바로 침대에 누워버리는 것만큼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 이런 습관으로 얻게 된 역류성 식도염으로 한동안 고생하고 나서야 의도적으로 식사 후에 걷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히 건강에 대한 염려와 의무감만이 산책을 시작한 이유는 아니었다. 글 쓰는 사람 중에는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김연수 씨는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라는 소설로 이상문학상을 타기도 했을 정도로 산책을 즐긴다 한다. 시인 박진성 씨 역시 그의 수필집 <이후의 삶>에서 산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런 막연한 동경 역시 내가 산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길을 찾고 사색을 하며 걸으면 수많은 영감들이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사색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구나.’를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산책하려 다니며 느낀 것은 산책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생짜 초보 산책가였으니 그냥 걷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음악을 들으며 아무런 생각 없이 걷고 안 가본 길을 신기해하며 기웃거리는 것이 다였다. 심심할 때는 전화를 하며 걷기도 했다. 산책이 나의 고차원적인 사유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일종의 멍 때리기, 운동의 수단이 되는 것이 언짢았으나 그건 그것대로 유익함이 있어서 꾸준히 걸어 다녔다.
꾸준히 다니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길에 있는 다양한 사물들이 눈에 띄었다. 버려진 TV, 세탁기, 가로등, 비닐봉지, 마트, 물 웅덩이, 고양이, 연인들을 눈으로 좇다가 이내 마음으로 쫓으며 각자가 가지고 있을 이야기를 상상했다. 내가 꿈꾸던 종류의 사색은 아니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그려질 때면 즐거웠다. 산책은 그렇게 나의 즐거운 행위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욕심만 가지고 시작할 땐 모르겠더니 열심히 하다 보니 그래도 나만의 산책 스타일이 생겨 즐거웠다. 이제는 산책을 취미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즐거운 산책은 두말할 것 없이 여자 친구와 함께 하는 산책이었다. 여자 친구는 나의 좋은 산책 메이트였다. 주로 고민거리를 나누며 산책할 때가 많았지만 그저 말없이 손만 잡고 걸을 때도 많았다. 아무런 생각이 드지 않아도 좋을 유일한 산책이었다. 온전한 행복의 손을 잡고 걷는 것 자체로 만족스러웠다. 마주 잡은 손에 가장 큰 확신이 들어있었으니, 답을 찾아 고민하며 걷는 일은 오히려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산책하며 눈에 띄는 것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여자 친구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벚꽃이 예쁘게 핀 봄날에는 산책하며 꽃 이야기를 하고 지나가는 고양이가 예뻤던 날은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져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갔던 동물원에 대해, 놀이공원에 대해, 생애 처음 보았던 불꽃놀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함께 하는 시간에 함께 한 추억들이 머무르며 더욱 아름다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취미마저도 입대하기 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훈련소에 들어오면 첫 주간은 각종 검사와 물품 지급이 이루어진다. 나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신원이 등록되어 훈련병이라는 직위가 주어지면 그에 필요한 물품들을 받는 것이다. 또한, 정신교육을 비롯하여 각종 기본 제식 교육들을 시행한다. “군기가 바짝 들었다.”할 때 그 군기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시간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과를 한다, 규칙적 생활을 한다 하는 느낌이니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이제 막 훈련소에 들어온 이들에게는 모든 일과가 버겁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 후로는 취침 전까지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시간은 없다. 모든 움직임은 분대 혹은 소대 단위로 실시되어 출발하고 도착할 때마다 인원을 점검한다. 누구 하나가 밥을 늦게 먹어서 밖에 오래 서 있게 되면 모두의 미움을 산다. 최대한 폐가 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움직이며 꼼꼼하게 자기를 점검해야 한다.
이렇게 생활 방식이 정형화되는 만큼 생활 반경 역시 정형화된다. 첫 주간은 코로나 탓에 모든 점호가 실내에서 시행되었기에 연병장에도 나가지 않았다. 강의실에 모여 교육을 받고, 밥 먹고 샤워하는 동선이 전부였다. 그 이외에는 막사 안에서 하루 내내 앉아 있어야 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상상은 할 수도 없었다. 막사에는 창마다 철망이 붙어 있었고 밖에 나가는 일과가 끝나면 외부로 출입하는 문 자체가 폐쇄되었다. 만일의 사태를 모두 대비해야 하기에 엄격하게 통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답답하고 불편하다는 생각은 계속해서 들었다. 게다가 2~3인이 반드시 함께 다녀야 한다는 전우조 단위의 생활은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문 열면 바로 앞에 있는 화장실에 갈 때도 아직 이름도 외우지 못한 동기들에게 양해를 구해 같이 가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산책은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길과 걸을 다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나의 취미생활이 완벽하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 갑갑한 생활 중에 그래도 산책이라고 부를만한 게 하나 있었다. 신체검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는 길은 산책로로 손색이 없었다. 혼자 걸을 수 있다면 말이다. 며칠간 계속해서 받게 되는 신체검사는 막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행되었다. 첫날 가족들이 모였던 입영 심사대 쪽으로 가는 듯했다. 조교들의 통제에 따라 몇백 명의 인원이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도 모른 채 걸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막사가 있는 교육 연대를 빠져나와 사회라고 불릴만한 그 중간 지대를 걷는 것은 즐거웠다.
논산이 논과 산밖에 없어서 논산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사실 그건 틀린 말이다. 한자를 보면 논산의 산은 뫼 산이 맞지만 논은 논밭 할 때 쓰이는 한자를 쓰고 있지 않다. 음차 해서 쓴 한자일 뿐이다. 틀린 말리라고 해도 왜 그런 말이 있는지는 알 수 있을 정도로 걸어가는 길에는 논이 참 많았다. 5월 중순 모내기를 할 시기가 되었는지 모들이 여기저기에 모여 있었다. 머리를 위로 질끈 올려 묶은 어린아이들이 잔뜩 모인 유치원 같아 보기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풀밭과 논 사이로 난 길을 지나 아직 키 작은 나무들이 좌우로 늘어선 길을 걸었다. 좌우 걸음을 맞춰라 열 간격을 맞춰라 등등 여러 가지 통제사항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서울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자연 한복판에 있다는 거으로 기분이 좋아서 걸었다. 이런 길로 매일 다닐 수 있다면 군 생활에도 위로는 있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늦은 봄에 피는 꽃들이 초록 잎사귀 사이로 눈에 띄었다. 희고 자그마한 꽃들이 아기 볼에 묻은 밥풀처럼 나뭇가지마다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이런 작은 즐거움들을 느끼고 있다고,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써 보내야지 다짐하다가 흰 꽃나무의 이름을 알고 싶어 졌다. 사진을 찍어서 보낼 수도 없고 설명하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도 스치듯 지나가야만 하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떤 모양의 꽃인지, 내가 이 꽃이 왜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전하고 싶었다. 이름을 알아서 보냈다면 여자 친구가 검색해보고 예쁘다고, 어떤 꽃이라고 꽃말까지 알려줬을 거이다.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경험하고 나눌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생각하며 수없이 많은 꽃송이를 뒤로 보내며 걸었다. 그때의 아쉬운 마음에 가장 가까운 시 한 편이 있다. 김소월 시인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시이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시인은 시를 통해 후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말을 반복하며 달을 잃고 나서 그리워지는 것과 소중히 하지 않았던 달이 이제는 서러움으로 느껴지는 과정을 어둡고 조용한 달밤에 혼자 읊조리듯 표현하고 있었다. 혼자 부르는 쓸쓸한 노래 같았다. 후회와 아쉬움이 클 때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말만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김소월 시인에게 ‘달’이 사랑일지 꿈일지 혹은 다른 무엇이었을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달’의 위치에 나에게 가장 가까운 것을 대입하여 시를 읽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달’은 ‘일상’이었다. 당연하고 소중한 줄 모르던 함께하는 일상이었다. 함께하는 일상이란 몸이 옆에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꽃 이름을 많이 알아두는 것처럼 사소한 일일지라도 함께한다는 것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늘려가는 것이겠다. 나는 언젠가는, 어디선가 혼자 해야 할 산책의 길에 너를 초대할 수 있는 사림이 되기를 소망했다. 손을 잡고 있지 않더라도 가장 가까운 마음의 친밀함으로 항상 최고의 산책이 나와 함께하길 기도했다.
나는 여전히 그때 그 흰 꽃나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한국의 야생화를 소개해놓은 책들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내 기억이 선명하지 않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지금부터라도 잘 기억하자는 마음으로 이름 모르는 꽃들을 보면 찾아보는 습관이 새겼다. 기술이 발달해서 사진을 검색할 수도 있는 세상이라 이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욱 가까운 마음으로 내가 보고 느끼는 것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