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누워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라

훈련소의 날시(詩): 1일 차

by 정오

훈련소의 날시(詩): 1일 차


3. 누워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


입대 당일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느지막이 잠에서 깼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8시쯤 되어 있었다. 얇은 흰색 커튼 너머로 날이 밝은 것이 느껴졌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펄럭일 때마다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쉽게 잠에서 깨지 못하는 나를 머리 쓰다듬어 깨우는 사려 깊은 손길 같았다. 얼굴을 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셨는지 어머니는 먼저 일어나 나갈 준비를 마치고 계셨다. 나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간단히 샤워하고 가장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을 정리하고 나가기 직전에 이미 수십 번을 확인한 가방을 다시 한번 뒤지며 준비물을 확인했다. 가장 중요한 신분증, 입영통지서부터 선크림, 로션, 평소 먹던 약, 무릎 보호대, 여자 친구가 챙겨준 시계까지. 애초에 훈련병에게 허락되는 물품이 많지 않은 거도 있지만 정말 소소한 짐이었다. 여기에 이제 밖에 나가서 우표와 편지지를 사면 준비는 끝난다. 나를 증명하는 데 필요한 물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최소한의 물건, 내가 세상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 물건, 그리고 나의 소식을 전하기 위한 물건까지. 어쩌면 우표와 편지지가 유일한 사치품인 짐을 꾸렸다.

13시 30분까지 입영 심사대에 도착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마지막 점심을 가족들과 함께 하라는 배려인 것이다. 우리는 10시에 맞춰 문을 여는 중국집을 찾아 아침 겸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초, 중, 고 졸업식마다 연례행사처럼 먹었던 음식이었다. 부모님 학창 시절에는 짜장면이 매우 비싼 음식이었기에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언제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지만, 그런 시대를 살아온 부모님이 사주시는 짜장면에는 자식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다.


아버지께 마지막 연락을 드릴 겸 식사 후 우리는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영상통화로 연결된 아버지는 무척이나 바쁘셨다. 손님들 틈바구니에서 간간이 나의 말에 대답하시며 아무렇지 않게 잘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역시 형과 나를 데리고 세상 돌아가는 일, 종교 그리고 학문 등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다. 금기인 것처럼 몇 시간 뒤면 가야 할 군대에 관해서는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괜히 마지막 분위기가 우울해지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이전에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최대한 유쾌하고 빨리, 그 주제를 넘겨버리곤 했다. 슬픔을 미룬다고 이별이 미뤄지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항상 눈물을 참고 걱정, 염려를 말하는 것을 참는다. 이별의 순간에 모두 쏟아내고,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뒤늦게 슬퍼하기도 한다. 즐거운 대화 속에서 나는 벌써 이별의 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입영 심사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주차장이 꽉 차 있었다. 주차할 곳이 없어 형은 차를 몰고 먼저 나가야 해서 미리 인사를 했다. 한참을 같이 있었으면서 막상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아쉬움이 컸다. 어머니와 나는 다른 사람들 다 하는 대로 훈련소 앞에서 사진도 함께 찍고, 적당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작별 인사를 해야 할 장소까지 걸어갔다. 걷다 보니 머리를 짧게 민 아이들이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포옹한 후 한 명씩 한 명씩 걸어가는 길이 보였다. 이제 가봐야겠다고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막막한 기분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알아서 잘 가겠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뒤돌아보지 않고 쭉 갈 테니 돌아가시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알겠다고 걱정 안 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눈시울을 적시셨다. 얼마 걷지 않아 길이 꺾이는 곳 앞에서 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고 싶어 졌다. 잘 가고 계실까 돌아본 자리에는 내 걸음을 뒤쫓는 어머니의 바쁜 눈이 그대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머니는 어린 친구들이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은총이 잘하고 와!”소리치셨다. 그래, 잘 다녀와야지. 나 자신에게 한번 더 다짐하며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5주간 함께 생활할 동기들을 만나고 막사로 가기까지 행정적인 분류 절차와 보안을 위한 여러 검사 과정들을 거쳤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라 건강에 대한 검사도 많았다. 입대 신청을 한 병무청 주소별로 인원이 분류되었고 개중에 남은 인원들은 지역별로 남는 인원이 섞여 소대가 완성되었다. 내가 그런 경우였고 나는 26 연대 3중대 2소대로 배치되었다. 몇 번씩 따라 복창하며 외우려 했지만 금방 외워지지 않았다. 쏟아지는 정보가 너무 많고 환경적 변화가 커서인지 알려주는 것들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훈련병들을 통제하는 저 조교들은 대체 몇 살일까 같은, 앞으로의 내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생각들이 자꾸 들었다. 잡생각들과 불만이 고개를 들었다가, 정신없이 이끌려가는 상황에 묻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저녁에는 조교들이 기본적인 보급품들을 지급해줬다. 개인별로 크기를 조사해서 군복, 군화, 생활복, 운동화, 슬리퍼 등 필수적인 물품들을 나누어 주었다. 내 발 크기는 245로 남자 중에서는 정말 작은 편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245 크기의 신발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군화는 어떻게든 발 크기에 맞는 것을 받으라고 들은 말이 있어서 며칠을 더 기다리기로 했다. 크기가 맞지 않는 것을 대충 신었다가 발톱이 상하거나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한 사례들이 여럿 있다고 했다. 담당 조교는 새로 주문하거나 재고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개인 맞춤, 요구사항 등은 아무래도 힘든 곳이었지만 당시에는 괜히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하며 그런 생각은 더욱 커졌다. 나는 급식소의 분위기를 싫어해서 대학을 다닐 때도 학식을 굳이 먹지 않았다. 훈련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앉는 시간, 모여서 출발하는 시간까지 모두 통제받으며 식사를 해야 했다. 친절할 수 없는 분위기, 나를 주장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모두의 머리 위로 ‘X 됐다.’하는 생각이 담긴 말풍선이 떠 있는 듯했다.


이곳이 나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이곳을 어떻게 추억하게 될까, 첫인상이 이렇게 좋지 않은데 과연 앞으로는 괜찮아질까. 고민하며 통제에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첫째 날이 벌써 저물고 있었다. 저녁 점호를 위해 침대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를 포함한 16명의 훈련병이 함께 생활하게 된 생활관의 이층 침대 위에 앉아 낮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 닿지 않을 만큼 높은 하늘을 자유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하지만, 손 뻗으면 닿을 만큼 낮은 천장은 뚜껑이 닫힌 잼 병 속 벼룩의 기분을 상상하게 했다. 마치 감옥 같았다. 고향을 떠나온 윤동주 시인이 별을 바라보며 존경하는 시인의 이름을 떠올렸던 것처럼, 나는 죄 없이 감옥에 들어가 살았던 이들의 이름을 하나 둘 떠올려보았다. 가장 먼저, 누가 봐도 핼쑥하고 아파 보이는 얼굴로 천진하게 웃던 천상병 시인의 사진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읽었던 그의 시 <귀천>의 마지막 연도 함께 떠올랐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은 1967년 동베를린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하며 고문을 당했다. 전기고문을 비롯한 각종 잔인한 고문들로 그의 몸과 마음은 크게 망가졌다. 그는 사건과 관련 있는 친구에게 돈을 빌린 적 있다는 사소한 이유로 감옥살이를 했고, 심지어 동베를린 간첩 사건이라는 사건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사건이었다. 시인이 느꼈을 억울함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런 사건을 겪은 시인이 쓴 시가 <귀천>이었다. 세상 사는 일을 소풍에 비유하며, 이 소풍을 마치는 날 하늘로 올라가 아름다웠다고 말하겠다 하는 그는 시 속에 억울함도 불평도 담지 않았다. 마치 새처럼 세상 위를 날아다니며, 내려다보며 얽히고설키는 세상 일들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고통의 한 복판에서 몸부림친 적 있는 사람이 쓴 글이라고 믿기 힘들었지만 반대로 몸부림친 적 없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은 더욱 아니었다. 삶의 비극과 희극을 모두 초월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글이었다. 그의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한없이 초연해졌다. 나 역시 이 불안을 끌어안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였다. 남들 다 오고 가는 군대가 뭐 얼마나 힘든 일이라고, 과장된 불안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이제는 든다. 그러나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때에는 가장 극적인 것을 붙잡고 싶어 지는 게 사람이다. 나는 당시 <귀천>의 시구를 마음으로 붙잡았다.


점호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16명의 낯선 사람들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 이부자리를 고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 뭔가를 쓰는 듯 사각거리는 소리 등 사연 있는 소리들이 생활관을 채웠다. 내 생각이 자리할 공간은 남아 있지 않았다. 조용히 나를 둘러싼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저 <귀천>의 마지막 행,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를 기도문처럼 되뇌며 어서 잠이 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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