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는 앞으로의 군생활을 축약해서 가르치는 곳이다. 대략 16개월의 군생활을 5주로 줄여놓은 코스이니 매일같이 새로운 것을 익혀야 한다. 익숙해지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면 오늘 밤부터 불침번을 서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도 듣게 된다. 온갖 검사와 쏟아지는 정보 속에 지쳐가던 3일 차, 어리바리한 기분으로 새벽 한 시의 불침번을 서게 되었다. 군생활이라고 부를만한 첫 번째 일이었다.
군에서의 취침시간은 규칙적이고 상당히 길다. 22시부터 다음날 06시까지가 훈련소 기준 취침시간이었으니 총 8시간의 수면시간이 제공된다. 충분히 긴 것 아니냐 생각하겠지만 군대에서 8시간을 재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며칠간 훈련을 받아보면 느끼는데, 꼬박 8시간을 다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육체적인 피로에 더불어 심리적인 영향도 있었을 것 같다. 새롭지만 기대되지 않는 일정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아침을 미루고 싶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훈련소의 불침번 근무 시간은 1시간이었다. 애초에 눕는다고 바로 잠드는 사람도 아닌데 중간에 1시간을 깼다가 다시 잠드는 일은 고역이었다. 가장 슬펐던 점은 불침번이 단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꽤나 자주 찾아오는 정기적 일정이라는 점이었다.
불침번이란 야간에 일어날지 모르는 비상사태를 경계하고 대비하는 인원이다. 비상사태라고 하면 탈영, 외부인의 침입, 화재 등 거창한 것들을 생각하기 쉬운데, 언제나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 그런 류의 비상사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침번의 주된 업무는 총 인원을 확인하고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환자가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일이다. 막중해 보이고 조금 살벌하게 들리기도 하는 “불침번”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다정한 업무다.
또한 훈련소에서 강조하는 불침번의 특징적인 역할이 있는데, 야간에 화장실에 가는 인원의 소요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다. 소변의 경우에는 1분, 대변의 경우에는 5분으로 기준을 정해두고 그 이상 화장실에 머무르면 특이사항이 있는지 점검을 해야 한다. 훈련소에서 생활하다 보면 긴장할 일이 많고 수분 섭취가 불규칙해 변비를 겪는 병사가 많다. 5분은 좀 짧지 않은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두세 번씩 대변 칸을 오가며 문을 두드려 생존신고를 받는 일이 흔했다. 아무래도 훈련소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자살사건이 생긴 전적이 있어 이런 지침이 정해진 것 같았다. 훈련소는 의지의 대상이 늘 옆에 있었던 사회와는 달리 외로운 곳이기에 마음이 약한 친구라면 언제든 갖가지 충동에 약해질 수 있는 곳이다.
불침번 근무 시작 15분 전에 이전 시간 담당 불침번이 나를 깨웠다. 15분이면 여유롭게 준비하고 갈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아직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는 과정이 익숙하지 않아 시간이 꽤 걸렸다. 잠이 덜 깨 몽롱한 것도 한몫했다. 게다가 주변 친구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기란 보통 조심해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때로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침대에 부딪혀 이층 침대 아래층 사는 친구의 항의성 헛기침을 듣기도 했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소변도 보고 간부 앞에 모여 보고한 후 지정된 위치로 이동했다.
밤은 짙은 어둠만큼이나 고요했다. 훈련소 주변에는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어 전체적으로 풍경이 휑했다. 그래서 막사 건물의 등만 꺼져도 어둠은 쉽게 찾아왔다. 창밖에는 간간이 보이는 가로등을 제외하고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새벽에 자다 깨어 몽롱했던 정신은 근무에 투입하고 시간이 지나며 점차 맑아졌다. 새벽의 조명가게에 홀로 켜진 전구처럼 멀뚱하게 자리에 섰다.
어둠 속에 홀로 밝아진 전구처럼 서 있으니 잡생각들이 날파리처럼 달려들었다. 다음 날의 일정을 생각하다가 생활관 문 너머로 들려온 잠꼬대 소리에 꿈의 내용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자대에서 불침번을 설 때면 전역 이후의 삶을 상상하기만 해도 몇시간이 훌쩍 가는데 훈련소에서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자체가 막막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 쌓인 먼지를 겸연쩍게 털어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몇 년이고 우려내야 하는 질문을 컵라면처럼 급히 끓어 먹으려고 하니 헛 대답만이 맴돌았다. 멋진 생각이 들 때를 대비해서 펜과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수첩을 몰래 챙겨 나왔는데 멋진 생각은커녕 몇 분 이상 같은 주제를 이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모래사장에 쓴 글씨가 때마다 밀려오는 파도에 지워지듯 짧은 생각들이 재잘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다행히도 나는 금방 이 정적인 소란에 적응했다. 끼어들 틈 없는 생각의 시장통에서 한발짝 벗어나 생각의 흐름을 관망하는 자리로 이동하니 새로운 고요가 찾아왔다. 더 이상 꼬리를 물지 않는 생각들이 별처럼 제자리에 머물러 조용히 빛났다. 평화롭고 영원처럼 아늑한 순간이었다.
시인 한용운은 이처럼 고요한 밤을 <밤은 고요하고>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밤은 고요하고 / 한용운
밤은 고요하고 밤은 물로 시친 듯합니다 이불은 개인 채로 옆에 놓아두고, 화롯불을 다듬거리고 앉았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화롯불은 꺼져서 찬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오히려 식지 아니하였습니다 닭의 소리가 채 나기 전에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였는데, 꿈조차 분명치 않습니다 그려
밤이 오면 우리는 시간을 상실한다. 동이 터 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어둠의 반복이다. 화롯불이 흰 재가 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수많은 생각들이 불처럼 타오르다가도 차분하게 가라앉고 흰 재가 되어 고요해진다. 그만큼 밤은 우리가 영원을 상상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시간에 쫓겨 시시각각 변하는 낮의 풍경을 살다가 어떠한 변화도 없는 시간과 공간을 마주한다. 영원에는 명암도 없고 오직 고요하겠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에서 오는 고요는 아닐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제 자리를 만들려고 달려들지만, 한 가지 가득 찬 무언가가 있을 때, 다른 것들이 들어올 수 없게 가득 찼을 때는 진정한 고요를 경험하게 된다. 시인에게는 그것이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기다리는 사람인지 섬기는 신인지 혹은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랑으로 그의 밤은 가득 찼고 식지도 않으며 시인을 고요에 잠기게 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사실 우리의 삶에 영원은 없고 밤의 시간도 결국은 흘러간다. 고요와 영원 속에서 마주한 깨달음은 옷 끝자락을 붙잡으려는 찰나에 사라진다. 무슨 말을 했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데, 어떤 음성을 듣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데 하다가도 꿈조차도 분명치 않게 사라진다. 두 발 뻗고 쉴 수 있는 생각의 끝이 어디었는지는 확실치 않고 끝의 존재를 알았을 때 얻는 안도감만이 남는다. 그때의 마음은 아쉬움보다는 그리움이고 슬픔보다는 쓸쓸함이다. 하지만 밤은 내일도 올 터이다. 내가 그 밤에 눈을 뜨고 있을지, 한 번의 상실이 아파 눈을 감고 보내버릴지는 나에게 달린 일이다.
불침번은 영어로 nightwatch라고 한다. 밤에 눈을 뜨고 감시한다 라는 의미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단어이지만 나에게는 “밤을 주시하는 사람”으로 읽혔다. 시간이 아닌 대상으로서 밤을 바라보는 이들이 불침번이 되는 것이다. 고요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둠을 주시하는 이는 어떤 마음일까. 영원인 듯 찾아왔다가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에 그리움을 심어 두고 때마다 들춰보는 이들. 그들에게는 밤이 찾아오는 날도, 그들이 밤을 찾아 나서는 날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