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살았다. 정원은 겉보기만큼 아름답지 않다. 여름이면 녹지를 찾아온 벌레나 쥐들이 마당으로 찾아왔다. 마당을 점거한 이들에게 집은 공유공간이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새로운 벌레가 들어왔다. 한밤중에 불을 켜다 손에 닿은 거미에 자지러진 적도 있고, 다리를 타고 오르는 미지의 감각에 잠에서 깬 적도 있다. 나방은 튼튼한 날개를 주체하지 못하고 밤새 거실 위를 비행했다. 나는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방문에 기대어 파다닥하는 특유의 소리를 살피곤 했다. 그 때문에 화장실로 향하는 길은 흡사 첩보물과 같았다. 한여름이면 앞문과 뒷문을 개방하고 낮잠에 들었다. 한참 코를 골며 자던 중 낯선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회색쥐와 마주했다. 쥐는 여느 벌레보다 얼굴이 귀엽다. 내쫓을 때마다 묘한 죄책감을 일으키니 더욱 성가셨다. 등굣길 신발 속에 손바닥만 한 거미가 진을 치고 있을 때도, 창문을 열다 말벌에게 쏘일 뻔한 때도 있다. 반갑지 않은 방문객이 나날이 늘어나서 벌레에게 집을 점령당하는 꿈까지 꿨다.
이런 고충을 모르는 친구들은 내게 정원이 있어 부럽다고 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여름 땡볕에 풀을 뽑아 봤냐고 물었다. 주말 새벽이면 아빠가 나를 불렀다. 한여름에도 긴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마당으로 향했다. 잡초는 일주일 만에 정강이까지 자랐다. 스윽스윽 스치며 나아가면 풀숲에 숨어있던 생물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소란을 뚫고 잡초제거를 시작했다. 뚝뚝 흐르는 땀방울보다 힘든 건 풀을 건들 때마다 달려드는 미지의 생명체였다. 알록달록한 거미와 뒷다리가 이상하리만치 긴 방아깨비 등이 풀잎을 헤칠 때마다 나타났다. 위협을 피하려면 반대쪽으로 달려가야 할 텐데 꼭 내 얼굴로 뛰어올랐다. 비록 초등학생이라도 매년 잡초제거를 해온 경력자였기에 함부로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내겐 한 뼘만 한 풀 높이가 사바나초원처럼 두려웠다. 그렇게 인내를 발휘해 하루 내내 마당을 다듬고 나면 반나절만에 풀이 무성해졌다. 몇 달 동안 겨우 1~2cm 성장하는 나와 달리 풀은 아침 이슬 몇 번에 자라다니 불공평했다.
집과 가까운 곳에 놀이터가 있었다. 당시 놀이터는 모래로 이뤄져 있어 손으로 펄 수 있었다. 우리는 이상하게 땅을 파는데 열중했고 손을 집어넣을 때마다 여러 벌레와 조우했다. 벤치에는 등나무가 우거져서 5월 꽃이 피면 벌이 무성해졌다. 머리 위로 드리운 나무에는 실처럼 작은 초록 벌레가 열매처럼 열려서 그 아래를 지나고 나면 꼭 머리를 털어야 했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빨간 철쭉이 봄마다 피어나고 그 사이를 나비가 유유히 날아갔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건 놀이터 경계를 따라 심은 개나리였다. 놀이터는 2미터 이상의 높은 담 위에 있었다. 담에는 허리 높이까지 자란 개나리가 덤불 져 있었다. 우리는 덤불을 지나 담벼락 위에 섰다. 키보다 높은 담에서 뛰어내리는 게임의 규칙은 간단했다. 더 높은 곳에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려야 하고, 만약 뛰어내리지 못하면 겁쟁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콘크리트 바닥으로 쿵 뛰어내리면 계단으로 빠르게 뛰어올라와 다시 바닥으로 착지했다. 겨울마다 무릎이 시린 이유가 이때의 무모한 행동 때문이라고 종종 생각할 정도로 매일 해가 지도록 반복했다. 용감성 증명이란 무모한 놀이가 끝나고 서로를 마주한 순간 우리는 도로 위를 질주했다. 중간중간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펄쩍 뛰기도 했다. 팔다리는 물론 이마와 목덜미까지 들어온 검은 송충이가 온몸을 기어 다녔다. 노느라 몰랐는데 다시 올려다보니 덤불이 송충이로 검게 보였다. 사건 이후로 서로 용감성을 증명하는 무모한 행동을 멈췄다.
송충이의 존재를 깨닫고 난 이후 놀이터가 던전 입구처럼 보였다. 거품처럼 불어난 송충이가 바닥으로 떨어져 인근 도로가 새까맣게 변했다. 벌레에도 굴하지 않고 놀이터 주변 도로로 걸어 다니곤 했지만 자동차가 벌레를 짓이기는 장면을 본 이후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린 맘에 그 부근의 땅을 빼앗겼다고 느꼈다. 송충이가 점령한 구역을 멀리서 지켜보던 나날이었다. 얼마 뒤부터 뿌연 연기를 뿜어대는 자동차가 놀이터 주변을 돌았다. 그 뒤를 쫓는 또래에게 뭐냐고 물으니 방역차라고 했다. 부우우우하는 자동차소리에 와하는 함성이 잇따라서 멀어지는 트럭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종종 창가에 앉아 트럭이 지나는 모습을 봤다. 얼마 뒤부터 도로를 점령하던 송충이가 사라졌다. 담벼락 아래를 걷다 깔끔해진 개나리 덤불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송충이 사건 이후로 담벼락에서 뛰어내리는 놀이는 완전히 끝났다. 개나리는 그저 놀이터의 바깥에 존재하는 일부가 되었다. 우리의 몸과 스칠 일도 가까이 다가갈 일도 없었다. 도로는 깨끗해졌고 공원에서 벌레에 시달리는 일이 줄었다.
시골로 이사한 이후 첫여름이었다. 그날도 바닥에 이불만 깔고 잠들었다. 한참 울어대던 개구리가 조용해진 후였다. 방안까지 들어찬 달빛에 살풋 깨어났다. 오늘따라 밝다고 생각하며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던 중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가려움이 이어졌다. 기어오르는 감촉에 정신을 집중할 때쯤 따끔한 느낌에 번쩍 일어났다. 이불을 젖혀보니 실가락처럼 얇은 지네가 다리를 둘둘 감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몹시 놀랐지만 옆에서 잠든 Y 때문에 소리를 삼켰다. 손으로 탁탁 털어내고 베개 옆의 책으로 쫓아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Y에게 별일이 다 있다며 소란을 피웠지만 속으로 어쩌다 겪는 신기한 경험으로 여겼다. 이때는 지네와의 만남이 매일 이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로 지네는 매일 밤 이불속으로 기어 왔다. 그냥 지나가면 될 텐데 꼭 몸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실처럼 얇고 투명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지네가 두꺼워졌다. 어엿한 크기에 색까지 짙어졌다. 물린 부위가 욱신거리며 며칠 동안 가렵고 아팠다. 자다가도 불안감에 눈을 떴다. 매일 시달리느라 잠을 못 자던 나와 달리 Y는 한 번도 지네를 못 봤다고 답했다. 그럴만했다. Y는 매트리스 위에서 잤고, 밤중에 일어난 내가 그 위로 올라가려는 지네를 저지했기 때문이다. 매트리스를 들이라는 Y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던 내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견디다 이불속에서 대왕지네를 발견한 날 거실 의자에서 잠들었다. 여름 내내 이렇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찬장을 열면 개구리가 앉아있거나 전자레인지 버튼에 나비가 붙어있었다. 말벌이 거실 중앙을 배회할 때도 있고 청개구리가 화장실 바닥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빨래더미에 숨어든 거미가 방 안으로 들어왔고 등에 붙어있던 사마귀를 뒤늦게 발견했다. 밤이 깊어지면 담너머 풀숲에서 반딧불이가 피어올랐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매일 집안을 돌아다녔다. 늘 다른 생물이 예상을 벗어나는 공간에서 튀어나왔다. 참신한 생물들 덕에 매일이 새로웠다. 일상에서 상식을 뛰어넘긴 어려운데, 곤충들은 늘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 두려움을 동반한 만남이 어느 순간 즐거워졌다. 하루하루 기록하고 싶을 정도로 새로운 일들이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일어났다. 불편하지만 괜찮았다. 지금 떠올려보면 내가 살던 곳은 그만큼 자연스러웠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주변을 뛰어다니기만 해도 다른 생물과 마주할 수 있었다. 가만히 관찰하다 손을 뻗어보거나 그쪽에서 옷깃에 닿아왔다. 다양한 생물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갔다.
도시에서 박멸당하는 지네는 밭에선 작물을 갉아먹는 벌레를 먹는 익충으로 여겨진다. 바이러스를 전이시키는 바퀴벌레에게 묻은 오염은 도시에서 발생한 오물에서 비롯되었다. 본래 생물은 여러 존재와 환경을 거치며 더러워진다. 인간의 DNA에는 세균, 바이러스의 진화로 추정되는 부분이 섞여있다. 어떤 존재도 완전히 결벽하지 않다. 모두 삶의 일원으로 균형을 잡아갈 뿐이다. 더러움을 뿌리 뽑기 위해 이뤄진 살포는 더 많은 오염을 야기했다. 자연과 벌레는 서로의 일부인데 대부분은 벌레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생태계는 생각보다 복잡해서 인간이 간과하는 부분까지 엮여있다. 잠시의 불편을 빠르게 해소하려다 더 큰 불편을 감수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지만 살충제가 도처에 놓여있다. 비용과 효율을 이유로 많은 농약이 사용된다. 마을 어귀의 반딧불이가 지내던 수풀이나 무당벌레와 직박구리가 살던 오디나무가 밀려나고 도로가 세워졌다.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여러 이유로 자연을 즐기기 위해 떠나야할 정도로 생활에서 멀어졌다. 어쩌다 왕래하지만 도로를 질주하는 바퀴에 짓이겨진 벌레나 뱀을 자주 목격한다. 놀이터의 모래는 고무와 우레탄으로 포장되고 당연하게 여기던 풀벌레 소리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나는 종종 기억 속의 소동을 떠올린다. 자연을 사랑하라는 말보다 더러움에 자연스러워지는 추억이 필요하지 않을까. 매거진 속 깔끔한 차림보다 땀과 흙으로 더러워진 옷이 결점이 되지 않는 환경이 멋지다고 요즘은 생각한다. 투닥대던 불편한 친구와의 사이가 기억에 남듯 경쟁하듯 부닥치던 벌레들이 지금에 와서야 떠오른다. 새들의 소란도 벌레들의 움직임도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