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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 Jul 29. 2023

가늠하기 어려운

가끔 반려동물이 말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키우는 식물도 더 표현해 주면 편했을 텐데라고 푸념하며 잎을 만진다. 고양이는 아프면 몸을 말고 구석에 숨어버린다. 닭도 생존본능 때문인지 아플수록 숨기려 한다. 어느 날 마당에 들개가 들이닥쳤다. 평소 들개가 집 주변을 돌아다닌 적이 없었고, 본래라면 꼭 계사 문을 닫았을 테지만 잠시 다녀온다고만 생각해서 방심한 틈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는 닭털이 날렸다. 백봉이라 하얗고 몽실한 털이었는데 마당 이곳저곳 구석까지 수북이 쌓였다. 덜컥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계사를 확인했을 때 평소처럼 횃대에 닭들이 앉아서 잠들어 있었다. 다들 꼬리나 날개 부근의 살갗이 드러난 채였다. 하나씩 상태를 살피는데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횃대 아래, 목욕용으로 둔 노란 박스 안에 막내가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닭들 중 가장 작고 사람을 따르던 아이였다. 가장 작은 주제에 사람을 지키겠다고 두려워하던 형에게 대들곤 했다. 형에게 맞고 벼슬에 피가 맺히면서도 사람을 보호했다. 처음에는 P와 나만을 지켰는데, 언제부턴가 모든 사람을 도왔다. 처음엔 고마운 맘에 간식을 줬는데 그마저도 거절하고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무리로 달려가던 똑부러진 아이였다. 


손으로 들어 올리자 등 한가운데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다친 탓인지 숨을 쌕쌕 가쁘게 쉬었다. 평소라면 마중을 나올 텐데 얼마나 아픈 건지 표현조차 못하고 숨어있었다. 급히 방으로 데려와 치료했지만 슈퍼나 식당 하나 없는 시골에는 약국조차 없었다. 온통 불이 꺼진 주택과 비어버린 공간뿐이었다. 밤공기가 서늘하게 끼쳐왔다. 가을 풀벌레 소리가 점점 퍼져갔다. 주변은 온통 산과 논뿐이었다. 급히 동물병원에 전화를 걸었지만 앵무새를 취급하는 곳은 있어도 닭을 치료하는 곳은 없었다. 밤은 깊어 기차와 버스마저 끊겼다. 주변을 둥글게 둘러싼 산을 봤다. 찌륵찌륵 풀벌레 소리가 도로에 울렸다. 자동차도 없이 이쪽과 저쪽 모두 막혀있었다. 일단 집에 있던 약품으로 최소한의 응급처치만 했다. 조금 진정된 후에는 보안카메라를 돌려봤다. 화면 끄트머리에서 소리가 나더니 매일 마당을 지키던 고양이가 무언가에 놀란 듯 반대편 담으로 도망갔다. 이내 들개 세 마리가 뛰어들어왔다. 들개들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단지 사냥의 즐거움을 위해서 닭들을 쫓고 있었다. 그중 가장 작고 어린 막내에게 들개 세 마리가 달려들어 발로 누르고 날개를 물었다. 개에 비해 막내는 너무 작았다. 나 또한 개와 살았던 사람이지만 순간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단지 자연의 섭리나 본능이라는 말로는 인정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후 막내는 제대로 서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밤새 옷이나 수건을 깔아서 서거나 눕도록 유도했지만 변을 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다른 이의 도움으로 겨우 먼 도시의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막내의 기낭이 터져서 생명이 위험하다고 들었다. 수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막내는 산소치료를 받으러 갔다. 기다리는 동안 곁을 떠났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자제되지 않는 감정이 울컥 솟구쳤다. 상대의 아픔도 나의 마음도 가늠되지 않았다. 표현되지 못할 형태로 감정이 방류되었다. 마트나 음식점에서 그램으로 계산되던 닭을 기르게 될 줄 몰랐다. 멀리서 그저 지켜볼 뿐 애정을 가진 적은 없었다. 병아리의 생김새나 행동을 유심히 볼 정도로 노력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책임만 맡겠다는 알량한 죄책감은 있었어도 닭을 위해 움직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P와 닭의 양육과 책임문제로 다투며 닭이 원망스러운 순간도 많았다. 그럼에도 손에 쥐었던 막내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통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동물은 살아있는 동안 아주 뜨겁다. 그 온기를 깨닫는 건 죽은 후였다. 사람도 어떤 동물이나 식물도 그랬다. 일단 굳고 나면 유연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근육의 움직임이, 풀잎이 흔들리는 모습이, 당연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나는 처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어딘가에 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빌 곳은 막내뿐이었다. 막내가 치료를 받는 동안 수의사가 얘기했다. 수의사는 막내의 의지에 달렸다고 했다. 


회복은 더뎠다. 숨만 쉬어줬으면 바랐는데, 일어설 수만 있으면, 홀로 식사를 할 수 있으면, 잠시라도 편히 누울 수 있으면, 으로 점점 바람이 커져갔다. 다행히 막내는 나의 얄궂은 욕심을 들어주듯 천천히 생활을 회복하며 자립했다. 스스로 눕지 못하던 막내가 바닥에 배를 깔고 잠들었다. 하얀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일상생활을 하기까지 두 달 넘게 걸렸다. 두 달이 지나고 나니 당연하게 여겼던 행동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지나 막내가 울음을 터트렸다. 미약하게나마 소리로 표현했다. 태어난 이후로 막내의 행동에 당연한 건 없었다. 이후 달리게 되기까진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완전히 회복하여 형제들과 합류하기까지 7개월가량 걸렸다. 지금은 그때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건강하다. 막내는 예전처럼 나를 향해 날개를 펴고 달려온다. 발치에서 우렁차게 울음을 뱉고 높은 곳까지 날아오른다. 쪼끄만 게 나를 지키려고 달려온다. 아플 때도 아프다고 표현하면 좋으련만, 제 고통에는 인색했다. 웅크리고 홀로 버티기만 하던 모습이 아른댔다. 예전 함께 살았던 개와 고양이도 그랬다. 둥글게 몸을 말고 홀로 견디는 아픔이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칼에 조금만 베여도, 어깨가 결려도 징징대는 나와는 버티는 힘이 달랐다. 그들은 어떤 소리 없이 감내하고 있었다. 내 몸의 반절도 되지 않는 생명이지만 그 속내는 더 맑고 강인하다.


막내는 지금도 바라는 것 없이 달려온다. 내 손에 먹이가 있든 없든 반기러 온다. 내가 쪼그리고 앉으면 다리 아래 파고들어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날아오르고 손을 쪼고 따라온다. 그 모습에 묘한 가책이 일어난다. 막내에 비해 나의 애정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다. 새의 3분의 1만 닮아도 양심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명들이 쉽게 사고 팔리는 세상은 부조리하다. 부조리하지만 호소하기 어렵다. 그 사실마저 부조리하다. 알량하게도 나도 부조리한 무리의 일부로 생활한다. 이렇듯 다시 본인위주로 생각하는 순간에도 막내는 스스럼없이 뛰어온다. 목청을 돋우고 내가 오기만 기다린다. 이런 경험 탓에 복날의 풍경이나 수많은 간판을 수놓은 치킨이란 글자가 아프게 다가온다. 그 많은 닭은 어디에서 공급될까. 집에서 달걀을 먹을 때도 알의 무게가 손이 아닌 마음으로 측량된다. 케이지에서 태어나 한 걸음조차 벗어나지 못한 채 부리가 잘리고 몇 개월 만에 소멸되는 열기를 떠올린다. 이미 필요 이상의 영양을 섭취하고 육식을 함에도 복날이 되면 더 많은 고기가 유통된다. 아직 닭은 좁은 케이지에 사는 게 당연한 듯 여겨진다. 혹은 도시로부터 시골, 시골 중에서도 깊은 산골로 숨겨지고 잊힌다. 최소한의 인간적 환경을 바라듯 최소한의 동물적 환경이 이뤄지는 순간을 떠올린다. 쉽게 거래되지 않는 생명이 조금이라도 더 늘기를 바라는 건 얄궂게도 막내와 같은 무리가 조금 더 살아서 내 양심의 가책을 줄여주길 원하기 때문이고, 유기견이 줄어 습격받을 위험이 적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모든 건 나의 아픔을 줄이기 위함일 뿐 아직도 상대의 마음은 가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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