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의 마중 속에 회사를 나왔다. 3년 간의 짐을 안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 본 하늘이 파랗고 높았다. 매일 드나들던 건너편 건물이 이젠 우리 회사가 아니었다. 까치가 낡은 콘크리트 위로 내려앉았다. 앞으로 뭘 해서 먹고사나 고민할 틈도 없이 버스에 올라 짐을 내려놓고 보니 주변이 고요했다. 한산한 차량으로 한낮의 후텁한 공기가 흘러들었다. 대부분이 말하는 시원섭섭함과는 다른 정의되지 않는 감정을 가늠하는 사이 정거장에 도착했다.
집에 벌렁 누워 발아래 놓은 짐을 보니 부모님, 자라나는 병아리, 고양이가 떠올랐다. 묵직해진 몸 위로 고양이가 올라왔다. 털을 쓰다듬고 있자니 뭐든 괜찮을 것 같다가도 한숨이 나왔지만, 그렇다고 회사에 있을 때 불안하지 않았느냐면,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어디에 있으나 불안하다면 차라리 다양한 삶을 경험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이래도 저래도 싫다는 건, 이러나저러나 괜찮다는 나름의 긍정적인 발상으로 이어졌다.
창을 올려보며 시골로 떠나게 된 사실을 곱씹었다.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삶이 아니라 버려지지 않을 제 삶을 일구고 싶었다. 혹은 회사나 사회로부터 선발되지 않더라도 살 방법이 있다는 용기를 갖고 싶었다. 마침 병아리가 성계가 되며 배변과 소음문제가 걸렸고, 시골로 내려가야 한다는 선택에 도달할 즈음 지인들은 내게 닭들을 농장이나 다른 사람에게 보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닭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할 순 없다는 조언이었다. 그 순간엔 나도 상실한다는 불안을 안고 있었다. 오랫동안 쌓아온 생계수단을 버리고 완전히 낯선 곳으로 가도 괜찮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뚜렷한 목표도 의지도 없었다. 그렇지만 수탉은 영역다툼 때문에 다른 무리에 들어가기 힘들고, 적응하더라도 이득을 따지는 농장에서 수탉을 잘 돌봐준다는 확신을 얻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알아버린 닭발의 열기가 잊히질 않았다.
그렇게 몇 달간 고민하던 중 마침 혼란한 회사사정과 맞물려 밖으로 나왔다. 나의 의지보단 Y의 의지가 더 큰 작용을 했지만, 어쨌든 퇴사를 결정하게 됐다. 오랜 시간 앓던 고민에 비해 바깥은 고요하고 일상적이었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출근 때마다 원인 모를 불안으로 울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용주로부터 버려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내 속에서 조금씩 부풀었고, 회사를 옮기고 프리랜서가 되더라도 비슷한 불안이 반복되리라는 사실이 암담하게 느껴졌다. 스펙과 능력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결국 상대가 필요로 하지 않으면 버려진다. 그럴 때 나는 스스로 풀칠할 정도의 기술이 없었다.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게 없던 터라 막연하게 살아온 탓이었다. 타의에 맞춰 자격을 갖춰야 하는 데 나는 그 정도로 유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그 시스템을 따르는 건 일종의 공모라고 생각했기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개조시키지 못했다. 컴퓨터를 아무리 잘 다뤄도, 학력이 뛰어나도, 경력이 많아도 상대에게 맞지 않으면 나는 버려질 수 있었다. 회사라는 조직을 잃었을 때, 돈이 증발했을 때, 자립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생존력, 도시가 없어도 살 수 있던 생물로서의 기본 힘을 갖춰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시골로 떠나게 되었다. 절반은 회사와 닭사정, 절반은 Y의 의지였다. 뚜렷한 계획 없이 외딴 시골로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추수가 한창이었다. 누렇게 익은 논에는 볏짚이 쌓여있고 낱알을 줍는 백로와 참새들이 분주히 날아다녔다. 복잡한 사정을 끼고 들어온 주택에는 볕이 잘 들었다. 덕분에 낮에는 따뜻했지만 밤이 되면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겨울이 되어서도 기름보일러인 탓에 난방을 충분히 돌릴 수 없었고, 마당의 달구들을 위해 온갖 온열기구를 계사에 넣어도 온도가 영하에서 오르질 않았다. 한겨울 방 온도는 9도, 계사 온도는 영하 8도까지 떨어졌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솥뚜껑이 온마당을 날아다녔다. 어릴 적 살았던 주택도 난방이 힘들었기에 고생할 줄은 알았지만, 이곳의 추위는 잠들지 못할 정도로 살벌했다.
식료품을 구할 가게도 없어서 버스를 타고 산을 넘어야 했는데, 노선이 둘 뿐인 데다 배차 간격이 2시간이 넘었다. 처음엔 인터넷이나 버스시간표도 구할 수 없어서 집 앞으로 버스가 지나가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달려 나가 메모지에 기록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버스안내시스템이 완성될 무렵 집에 인터넷을 들였다. 컴퓨터로 마을버스시간표도 발견했다고 기뻐했는데 곧 들이닥친 노선개편은 알지 못한 채 엄동설한에 정류장에서 30분 동안 버스를 기다렸다. 노후된 주택의 문제나 버스 이동 등의 문제로 고생한 지 2개월 즈음, 해결법을 스스로 찾거나 방식을 익히며 적응해 나갔다. 동네에 익숙해질 무렵 느긋하게 산책을 하다 기찻길 근처로 접어들었고, 자전거도로를 발견했다. 곧바로 여행을 떠난 나는 자전거로 산을 돌아 읍내까지 다다랐다. 버스시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다니, 쾌재를 부르며 자전거를 타고 장보기에 나섰지만, 한겨울의 라이딩은 살인적이었다.
당시에는 모호했던 상실감이 점차 분명해질 무렵 전기세가 15만원까지 솟았다. 계속 떨어지는 계사 온도를 높이기 위해 장판, 온열전구, 열풍기를 들인 결과였다. 흔히 닭은 눈비를 맞으며 겨울을 견딘다고 하지만 닭도 감기에 걸린다. 특히 백봉오골계 털은 일반닭 보다 가늘어 보온에 약하다. 일반닭도 겨울에는 벼슬이나 발에 동상이 걸린다. 사람처럼 닭도 겨울을 견딘다. 그럼에도 닭을 겨울에도 밖에서 키우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육닭은 비용문제로 치료나 보온보다는 죽는 게 싸게 치기 때문이다. 혹은 예전부터 그렇게 키워왔기 때문에 닭은 본래 그렇게 키우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물론 가치관 차이지만 사람도 바깥에서 겨울을 이길 수 있지만 생존확률이 떨어지듯 닭도 마찬가지다. 유난스럽게 보일 수 있어도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밖에 내버려 두지 않고 대피소나 최소한의 환경을 갖춰주는 것과 같다.
그렇게 두 달 전기세가 10만원을 훌쩍 넘긴 후 고민 끝에 달구들을 한 마리씩 박스에 담아 거실에 들였다. 추위를 피해 들어선 사람, 고양이, 닭으로 거실이 북적였다. 막 돌아가기 시작한 보일러소리가 집에 울리고 바닥이 미적지근하게 덥혀졌다. 상자 속 닭과 가슴 위 고양이를 확인한 뒤 불을 껐지만, 2시간 정도 지나 다시 눈을 떴다. 외풍은 창을 뚫고 커튼을 지나 머리까지 불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입김을 가만히 올려보다 식식, 낯선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달구들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다양한 성격만큼이나 자는 모습도 제각각이어서 어떤 백봉은 목을 날개에 감아 넣었고 어떤 백봉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잠꼬대를 했다. 쌕쌕대는 숨소리 여섯과 이불속 셋. 화음처럼 울리는 숨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 밝았다. 오랜만의 깊은 잠이었다.
이어지는 겨울, 다시 아침이 밝고 밤에 접어들었다. 잠들기 전 가만히 누워 달구들의 숨을 들었다. 퇴사일에 보았던 까치와 고요한 버스 안이 떠올랐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건 상실감이었을까, 당시 모두가 얘기했던 '모든 걸 포기하고'의 '모든'이란 평범한 생활 전반을 지칭한다. 비록 반 평 남짓한 자리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돈을 버는 행동, 지위 같은 가꿔왔던 것들을 놓는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상실이냐고 물으면 되려 놓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을 달구들을 구실로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새로운 광경을 보고, 힘들지언정 이렇게 살아있다. 자동차가 없어도 자전거나 도보로 산을 넘을 수 있고, 보일러가 약해도 체온에 기댈 수 있다. 되려 부족할수록 소중한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다시 아침이 밝고 달구들은 계사를 뛰쳐나와 마당을 뛰어다닌다. 한겨울의 추위를 가로질러 봄으로, 여름으로 향한다. 닭이 날개를 퍼덕이고 목청을 돋운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목처럼 얼었던 밭에 풀이 솟아오른다. 아직 막연하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하루하루가 쌓여간다. 매일 시작점에 선 듯 새로운 일이 이어진다. 멀리 논밭에서 쟁기질하는 소리가 울린다. 언 땅이 녹고 어느덧 앓아왔던 불안이 잔여물처럼 떨어져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