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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주 Oct 07. 2022

상식에 기준이 있다면.

성숙한 심술

정치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단어가 “상식 아닐까 한다. 상식적으로 상식 있는 사람이 들먹여야 되는 단어가 “상식아닌가? 상식에 명확한 커트라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상식의 사전적 의미 :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에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이 너무 천차만별이거니와, 문해력이 소외된 소통이 힘든 시대이며, 언어를 파괴하다 못해 세대 간 대화가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는 판국에 일반적 견문에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 따위를 할 수 있기나 하나?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나의 상식 커트라인을 기준 삼을 수밖에 없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낮잠 자는 것은 아까운 시간이라 여기고, 곧 죽어도 오늘의 빨래는 내일로 미루지 않는 남자와 살고 있다. 그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주말 출근해야 되는 날에도 빨리 일을 마치고자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이다. 다행이라면 그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의 잣대로 나를 재단하지 않고, 조율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 그를 높이 평가해주고 싶은 부분이고 상식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이다.

그는 주말 출근으로 피곤해도 딸아이와 나에게 외출을 권하는 사람이다. 피곤함을 입에 달고 살지만,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옹골차게 챙기는 사람이다. 오히려 그런 그를 보는 내가 피로감과 피곤함을 느낀다는 게 심각할 지경이다.

치열하게 시간을 쪼개어 주말에는 가벼운 산책이라도 조촐한 세 식구가 외출을 하는 편이다. 점점 친구가 더 좋은 때를 보내는 딸은 그게 불만이지만, 일단 외출 후 돌아오면 만족도가 높아서 칭얼대면서도 잘 따라다닌다.


딸의 칭얼거림은 주말 친구와 놀고 싶은데, 아빠의 외출 계획으로 인해 항상 아쉽게 논다는 데 있다.  또한 집순이라 남의 집에서 노는 것보다 우리 집에서 노는 것을 선호하고, 안정감을 느끼기에 매번 친구와 노는 날은 우리 집이다. 주말 오전 아빠가 출근하고 나면 절친인 친구가 집으로 오겠다는 문자가 온다. 언제부터인가 루틴처럼. 친구는 주말 아침에 우리 집으로 오기 시작했다. 가끔은 사정상 못 만나는 날도 있지만, 우리 집이 가능한 주말은 늘 딸의 친구가 온다.


특이하게 딸의 친구 집은 주말에 일하는 엄마로 인해, 주말에는 아빠가 아이들을 케어하고 있었다. 친구의 엄마도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알고 지낸 사이였고, 주말에 직업 특성상 일을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은근슬쩍 나에게 그 엄마는 아이를 맡기기도 했었다. 내게 도움을 받아도 딱히 내가 이해할 만큼의 고마운 표현을 받은 기억이 없다.

나라는 사람은 내 아이가 남의 집에 갈 때 빈손으로 보내는 일이 없다. 남의 집에 가져갈 것이 없으면 뭐라도 사서 보냈다. 그런데 그 엄마는 항상 빈손으로 아이를 맡겼고, 식사 때가 되어도 어련히 내가 먹일 거라고 생각하는지 연락도 없고, 아이가 집에 돌아간 후에도 전화 한 통이 없다. 여전히 달라진 것 없이 여전하다.

나의 상식으로는 ‘좀 뻔뻔하네.’라고 매번 되새김질하면서도, 딸아이와 예쁘게 노는 친구를 보면서 그런 생각조차 불순한 것 같아 생각을 매번 고쳐먹는다.


어느 일요일 아침에는 시리얼을 먹고 왔다길래, 다시 아침상을 차려 밥을 먹인 날도 있었고, 간식을 먹일라 치면 밥이 될 만한 것을 신경 써서 내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 계산이 없는 아이의 입에서 차마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고 말았다.

“아빠가 점심까지 먹고 와도 된데요.”


순간, 뭔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상식에는 벗어났으나 순수하게 좋은 어른으로서 아이를 케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득과 실을 따지지 않고 호의를 베풀었다. 이게 호의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 같았다. 나아가 나의 인간 됨됨이를 자문하게 하기도 하였다.

나의 순수를 헤치고 싶지 않았고, 성숙한 사람으로서 사고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사실, 한동안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치사해서 거리를 두기도 했으나, 아이들의 세계와 세상에 어른의 이기와 계산적 행동이 방해를 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친구의 부모를 나의 잣대로 평가하거나 폄하하지 않으려 애썼다.


기실 한 끼 차려 주는 일이 뭐 대수라고, 어차피 먹어야 하는 한 끼에 숟가락 하나 더 얹히는 일이 뭐라고 생색일까 싶겠냐만은,

밥을 차려 먹일 때마다 안쓰럽기도 하였고, 혹여 딸아이와 생기는 마찰에 공평하지 않아 상처받을까 조심했고, 나눠 먹이는 음식에도 내 아이보다 예쁘고 좋은 걸 주려고 하였다. 고마움을 보상받으려고 했던 생각은 애당초 없었지만, 나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상처가 되기는 했다.


남편은 주말마다 퇴근하면 딸아이의 친구가 우리 집에 놀고 있으면, 나에게 눈빛을 보낸다.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다.

호구이길 자처한 배우자의 넓은 호의가 못마땅한 눈빛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차마 그 얘기까지는 꺼내지도 못했다.

매번 그가 묻는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 맞아?”

매번 나는 대답한다. “딸의 친구고,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다. 어른들의 잣대로 순수한 세계를 헤치고 싶지 않다.”

그는 못 이긴 척 “알았다.”라고 하지만, 내 마음속의 성숙한 심술은 어쩔 도리 없이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욕을 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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