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세속
결혼 전,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절에 모시기로 결정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네 자매 중 막내이다. 나의 결혼은 곧 친정엄마 홀로 제사를 지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필 네 자매는 모두 제사를 지내는 집안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집안이었거나, 장남이 아니었더라도 명절 친정에 제사를 지내러 간다고 좋아할 시댁이 있었겠냐만은.
하여, 일면식 없는 남의 집 조상 제사를 지낸다고 친정아버지 제사는 절로 모셨다. 제사의 형식보다는 엄마가 홀로 제사를 준비하는 번거로움과 처량함이 더 클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의 집에는 제사가 명절 2번+기제사 4번. 도합 6번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것도 줄이고 줄여 6번이 되었다고 한다. 제사와 관련한 어머니의 노고는 제사 때마다 듣고 또 듣는 무한 반복된 이야기였고,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어머니의 제사 준비는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는 생선을 사기 위해, 하루는 육류 및 기타, 하루는 채소 및 기타… 여러 날을 제사 준비로 분주했다. 물론 어머니의 제사 준비를 나에게 강요하시지는 않으셨으나, 도움이 되든 안되든 안쓰러움과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제사 준비를 위해서 하루 꼬박 음식 냄새를 맡으며 준비하는 과정은 아무리 좋은 마음을 먹어도 힘들고 지쳤었다. 가장 힘든 건, 나는 누구? 나는 내 조상도 아닌데 왜 해야 하지? 누가 이걸 다 먹는다고? 내내 불편한 질문들이 몸과 마음을 동시에 힘들게 했다.
제사의 유례를 찾아보기도 했고, 이 오래된 관습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심하던 때도 있었고, 남편에게 제사에 사용되는 재화와 낭비에 관해 끊임없이 조율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제사에 진심인 시어머니의 정성에 묵묵히 서포트해 주는 일이 뭐 힘들겠냐고? 그래도 우리 집은 상식 없는 어른들이 아니니까.라는 말들도 설득력이 없었다.
이성적 사고력으로 제사를 지내다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것 같아, 판단을 하지 않기로 생각을 고쳐 먹었다.
아주 오랫동안 내려온 한국의 세속이지 않은가? 제사에 모든 사활을 거는 데는 자식들 잘 되리라는 염원이 깃든 것이지 않은가? 허투루 조상을 모시면 집안에 우환이 든다고 하지 않는가? 어른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는 내 생각을 고쳐 먹고, 맞춰만 드리자라는 심정으로 일을 했다.
결혼했을 당시 시할아버지가 살아계셨는데 왕래를 하지 않았다. 이유는 시할아버지께서 재산분할을 장남인 아버지와 상의 없이 동생들에게 넘겨주었고, 3년이나 지나 그 사실을 알고 아버지와 어머님은 충격과 배신에 몸서리를 치셨다고 한다. 제사 때마다 말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장남을 무시한 처사였다고 단단히 화가 나셨다고 한다. 시할아버지의 변명은 장남보다 못 사는 것 같아 동생들에게 주었다고 하나, 어머님은 서운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동생들과 시할아버님의 일이라면 솔선수범과 화 한번 없이 K장남으로서 역할을 다 하셨던 아버님은 그 일로 시할아버지께 발길을 끊으셨다고 한다. 모두 한 통속으로 당신을 속였고 기만했다고 여기셨을 테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뒤덮기 전년에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아버님의 형제분들이 상의를 하셨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도 제사를 먼저 지내겠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고, 아버님의 동생분들은 당연히 아버님과 어머님이 제사를 지낼 거라 예상하는 듯 보였다. 어머님께서 제사를 모두 절에 올리자고 제안하자 침묵이 흘렀다. 어차피 아무도 지내고자 하는 이가 없으니 똑같이 돈 내서 절에서 공평하게 지내자고 하였다. 어머님은 “장남이라고 더 받은 것도 없고, 똑같은 자식이지 않느냐?”라고 말하자 못 이긴 척 수긍을 하였다.
맏며느리로서 20년 이상 제사를 지내 왔는데, 그 누구도 고생하셨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멀리서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있었는데, 화가 났다.
K장남, K맏며느리로서 살아온 것은 선택이었을까? 가스 라이팅 되어 살아 낸 풍습이었을까?
그 사건 이후,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다.
“와, 네가 제일 혜택 받았어.”
뭐래? 제사가 사라진 것이 K장손의 며느리인 나에게 혜택이라고?
그럼 그전에 영혼을 분리하여, 당연한 듯, 체념한 듯, 육체적 노동을 갈음하여 준비했던 제사는 오직 내가 했어야만 하는 나의 일이었던가?
나는 그저 결혼으로 맺어진 사람들을 지지했고, 사랑했고, 그들을 도와 기꺼이 준비하고 치렀을 뿐이었다고.
어디서부터 이해시키고, 바꿔 줘야 할 사고의 영역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교육이 문제였을까? 제사라는 풍습 자체가 잘못된 걸까? 남자가 해야 하는 일과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의 간극일까? 세대를 거치며 제사의 허례허식만 남은 것인가?
같이 사는 사람이라도 설득시키고자 애를 쓰기도 했다.
그래도 시할아버지가 다니시던 절에 모시면 좋을 것 같아, 고향인 산촌에 있는 절에다 모셨다. 절은 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고즈넉한 절이었다. 차로 산꼭대기까지 가려면 스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여 마주오는 차가 있다면 옴짝달싹 못 할 지경이었다. 명절과 기제사 때마다 절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오갔는데, 코로나로 인해 최소인원만 제사를 지내러 오라고 하기도 하고, 명절에는 오지 않기를 권유받기도 했다.
다행히 산소는 호국원에 묻히셔서, 오히려 자주 호국원을 다녀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절에 스님이 바뀌시면서, 이 절에서 음식을 차려내려면 늙은 보살들을 불러 제사 준비를 하는데 힘들다고 하셨다. 하여 최근 시할아버님의 제사를 끝으로 절에서 조차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코로나로 제사를 멀리하게 되었고,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절에도 신도와 보살의 이탈로 인해 제사를 준비할 수 없게 되었고, 조상의 제사를 책임 질 자식들은 아무도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 하니, 어쩔 도리 없이 형식적인 제사는 사라졌다.
결국, 제사는 각자 호국원에 다녀오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제사라는 형식에 메여 있던 모든 것이 코로나를 거치며, 축소되었다가 극적으로 간소화되었다. 이 변화를 지켜보던 나로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꽤 오랫동안 생각 중이다. 사실, 지금도 정리가 잘 안 된 상태이다.
결혼하고 몇 해동안 제사를 준비하면서 어머님은 결코 제사를 놓지 못할 분이라고 생각했다. 간혹 “내가 너한테는 제사를 안 물려준다.”라며 남편에게 말씀하시기는 했으나, 어머님의 제사 준비는 가히 진심을 넘어 비합리적인 준비과정과 정성이었다. 어쩌면 질량 보존의 법칙에서 이미 다 채우고도 넘치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쿨하게 제사를 떠나보낼 수 있었을까?
친정아버지의 제사도 형식만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명절은 남의 편 제사 지내느라 가보지도 못하고, 기제삿날 모여 절에서 1시간 남짓 절에서 준비해 준 제사를 지내고 오는 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네 자매가 다니는 절에서도 코로나로 최소인원만 제사에 참여 해달라고 하였고, 인사이동으로 인해 스님도 바뀌면 제사의 분위기도 같이 변했다. 자매들 역시 제사의 형식에서 벗어나 아빠를 기리는 날, 산소에서 모여 간단하게 절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로 꾸려보자고 이야기를 했다.
시댁의 제사 변화는 친정의 제사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고, 둘째 언니네는 제사를 절로 옮겼고, 셋째언니네는 명절에만 제사를 지내기로 했고, 큰 언니는 제사 음식을 최소한으로 간소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또한 차츰 형식은 버리는 것으로 줄여 갈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를 거치며 우리의 의식이 바꾸어진 것인지? 환경에 의지해 서서히 잘못된 의식을 바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인지?
변화도 시간이 필요하고, 자극이 필요하다. 코로나를 인하여 많은 것이 단절되었지만, 잘못된 관습을 끊어내는 가교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부디, 제사의 형식은 사라졌어도 제사를 통해 조상을 기리고,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만남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