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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Jul 31. 2020

나와 내가 아닌 것 사이에서

나답지 않은 것도 모두 나였다


나는 한 때 심리테스트를 좋아했었다. 좋아하는 꽃을 고르면 나도 모르는 내 속마음이 밝혀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얕고 허무맹랑한 테스트들은 순간의 재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 대학교 때 에니어그램으로 자신의 장단점을 찾고 그로부터 성장의 방향을 코칭받는 의를 듣게 되었다. 재미있기로 아주 인기 있는 강의였다. 그 수업 특별했던 것은 흔히 하듯 검사를 통해 유형을 확정받는 이 아니라, 직접 책을 읽고 사람들과 그룹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유형을 찾아나가는 방식이는 점이었다. 아마 선택지를 고르는 검사 한 번으로 유형이 고정되었다면 그 수업은 심리테스트의 연장선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직접 성찰하고 구분해야만 답을 낼 수 있는 시간을 주함으로써 내게는 인생이 전과 달리 조금 비껴나가는 기회가 되었다.


처음 나는 내 유형을 금방 찾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 유형도 나 같고, 저 유형도 나 같고, 여기저기에 내가 있었다. 원래 심리테스트나 성격유형 검사의 맹점이 바넘 효과(성격에 대한 보편적인 묘사들이 자신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라는 것이기는 한데, 이를 넘어 나라는 사람의 경향성을 찾기가 어려다.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 또 완전히 혼자 있기는 불안했다. 친절하게 잘 웃고 맞추면서도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책임감이 강하면서도 책임지기를 매우 싫어했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싶지만 선을 넘기는 두려웠다.


당시 가장 가까운 친구 넷에게 내가 따뜻한지 차가운지를 물었더니, 의견이 하필 반반이었다. 답은 역시 스스로 고민해서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긴 싸움 끝에 알게 되었다. 나의 가면들에 대해서...


페르소나*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말하는데, 즉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를 의미한다. 주위의 일반적 기대에 타협한 결과 페르소나 자아를 의존하다 보면 고유한 내적인 정신세계와연결을 상실하게 . 나에게바로 그 두터운 페르소나가 있었다.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조화롭게 웃으며 지내던 세상 속에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나는 A를 좋아하지만 사람들은 A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들 속에 끼어 있기 위해 A를 버리려애썼다.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B 또는 C, D 그 어느 것이든 다른 것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때에 따라 가면을 만들어 쓰고서... 외롭지 않으려고 했던 노력이 진정한 나를 소외시키고 더욱 외롭게 만들다.


사실 페르소나를 쓰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도움이 기도 한다. 사회 속에서 주어진 역할 제대로 기능하고,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데 있어 필요한 수단이 된다. 물론 적절히 쓴다면 말이다. 본질을 넘어서지 않을 만큼만, 힘들지 않을 만큼만. 그러나 나는 고통스러웠다. 어느새 가면은 크고 단하게 달라붙어 있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 살지 못하는 고통조차 그 속에 숨겨져 있었다. 벗어도 그 속에 가면이 있고, 또 벗어도 그 속에 또 가면이 있는 것처럼 진짜 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 없는 몸뚱이, 길 잃은 마음속은 늘 갈등으로 몸부림쳤다.

'이러면 사람들이 싫어하는데.. 그런 저러기가 싫은데.. 어떡하지...'

은희경 님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 '온몸이 묶인 채 검은 물에 실려서 어딘지 모를 어둠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라고 한 것처럼 그전까지 나는 거대한 물살에 떠밀려 빠져나올 생각도 못한 채 숨을 참고 견뎌온 것만 같았다.





 수업을 계기로, 남은 20대청춘 뒤늦게 나를 세밀 들여다보는  보냈. 고민의 글을 끄적이고, 모임 활동을 나가고, 실수를 하고, 또 과오를 바로잡았다. 진로 변경과 이런저런 고민 끝에 심리학 대학원에까지 진학하게 되었다. 심리상담을 잠시 받았고, 20대의 끝자락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 키우며  속에 몸을 푹 담근 치열한 경험들도 하였다. 끊임없이 나의 몰랐던 면을 발견하고, 새로이 유연한 경계 세워졌다.


그 시간들 끝에 깨달은 건 '모든 순간이 나였다'는 사실이었다. 불안하기에 집단에 맞춰가려 하는 것이 나의 본성이고, 그래서 친절하게 때로는 편집적으로 굴며 다양한 모습을 가지는 것도 그저 하나의 특성이었다. 체를 놓고 보면 결국 만들어낸 가면조차 전부 나였던 것이다. 나를 잃어버린 것도, 나를 찾으려는 것도 모두 나였다. 괴로운 것도, 슬픈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그 자체로 당히 온전한 삶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성격유형 검사인 MBTI도  간이 되는 융의 분석심리학까지 깊이 들어가 보면, 림자*의 개념을 접하게 된다. 그림자는 자신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 측면에 있는 분신이라고 한다. 대개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면의 일부를 주위 사람들에게 투사하고 자신의 의식 속에서 지워버림으로써 자아를 유지다. 주로 자신의 나쁜 면을 투사하지만, 좋은 면에 대해서도 남에게 투사를 해서 자신은 열등하게 보고 타인을 매우 질투하기도 한다. 그러니 성찰해보면 주위 곳곳에 나의 내면이 묻어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못 하는 것도 단지 익숙하거나 능숙지 않을 뿐 실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융은 인생의 후반기에 자신이 잘 쓰지 않는 열등기능도 개발하여 모든 면을 통합하는 "개성화"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였. 그러니까 그림자는 인격의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으로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자를 의식화하고 나의 일부로 통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아닌 것'도 이미 나의 일부일지 모른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을 비출수록 뚜렷해지는 그림자까지 모두 합쳐서 하나의 인간이 존재하니까. 나와 내가 아닌 것 모두  안에 . 그리고 나는 세상 속 어디에나 흔하게 있다.


내가 누군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아마 평생을 정의 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만 전처럼 페르소나에 의지하여 락한 삶을 만들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나다운 것을 넘어서 내가 아닌 그곳에도 내가 있다. 그저 두려움을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삶의 파도에 여전히 수시로 휩쓸리지만,  이상 도당하지 않고 그 파도를 타 일에 조금씩 적응하여 살아간다. 모든 날들이 다 적당한 인생이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서로를 알고자 하지 않으면, 그들은 평생 자신의 이면이 자신과 같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 웹툰 <죽음에 관하여> 외전 '이면'




*바넘 효과(Barnum Effect)의 개념은 네이버 지식백과 심리학 용어 사전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페르소나(Persona), 그림자(Schatten) 개념은 <분석심리학>(이부영 지음, 조각)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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