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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각화 Mar 25. 2024

아득한 어둠 속 그 안에서도 꽃은 피어난다-04

넷째의 출산. 아! 무슨 말이 필요한가_멘털 붕괴의 끝은 어디로...

출산의 고통.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그 고통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모든 엄마들은 아이 하나로 족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잊는다.


내 얼굴이 비치는 아이의 맑은 눈망울에.

옹알이하는 그 작은 입술의 움직임에.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의 꼼지락 거림에.

자박자박 걷는 그 발걸음에.

'엄마!', '아빠!'라고 불러주어 나를 엄마로 만들어주고, 내 곁에 그를 아빠로 만들어주며, 나와 그를 부모라는 이름으로 성장하게 해 줌으로.

자꾸만 잊는다.


아이의 재롱에 미소 짓고 온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 함께하는 것에 감사하며 삶의 행복에 젖어 지내는 날들로, 출산의 고통 따위 까맣게 잊고 살다가진통의 시작을 느끼는 순간.

잊었던 고통이 떠오르며, 심호흡과 식은땀이 옷을 적신다.


넷째를 출산하던 날.

그날도 그랬었다.




아이들 넷을 출산하면서 신께 항상 감사를 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아니.. 어머니께 감사를 드려야 할까?

이런 건강한 몸을 주셨으니.


출산에 임박한 시기가 되면 신기하게도 느낌이 다. 아래로 배가 내려가고, 묵직한 배가 불편하긴 하지만 좀 더 숨쉬기가 편해진다. 그리고 규칙적인 진통과 마지막 징후인 이슬이 항상 먼저 보였다. 산부인과 책자에 기록된 그 글들의 표본처럼 그 진행과정이 상당히 FM이었다.


갑자기 하혈하거나, 양수가 터지거나, 통증이 갑작스레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넷째 막달에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운동한 만큼 분만 과정은 수월하다는 걸 의사 선생님들께 많이 들어왔고, 앞선 셋의 출산 경험으로 안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던 날, 혼자 있다가 밤에 신호가 오면 어쩌냐는 남편의 걱정에 급하면 구급차 부르고, 엄마도 계시니 걱정 마시라 전했다. 그리고, 느낌이 오면 당신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하겠다고.




그날은 턱 밑까지 내 몸의 힘겨움이 느껴지던 날이었다.

숨은 가쁘고, 이제 '그만 나와줄래?' 소원하던 날.


배가 처지지 않으니 아직 시간이 있다 여기곤 아이들 셋을 데리고 마음의 의지처인 친정에 걸음을 했다. 임산부 걸음으로 7분. 가까우니까. 운동도 되니까. 엄마의 따뜻한 밥을 먹고 상쾌한 가을바람맞으며 다시 아이들과 나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짧은 거리에서 몸의 변화를 느꼈다. 숨 쉬기가 편해지는 거다. 불과 두 시간 전 턱 밑까지 힘들다고 여기고 숨쉬기도 힘들다고 여겼는데, 배가 처지는 것이 느껴지고 숨이 편안하게 쉬어졌다. 느낌적 느낌으로 아.. 우리 넷째가 신호를 주는구나 했고. 언제든 갈 수 있게 챙겨둔 출산 가방을 한 번 더 체크했다. 이렇게 느낌이 오고 나면 며칠 안에 출산을 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말이다.


그런데, 빠르다.

아이들을 다 재우고 잠자리에 들려할 때쯤 진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슬이 보였다. 그 새벽에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인 것 같아."


며칠의 시간이 아니라 겨우 한나절 정도의 몇 시간 안에 진행됐다. 난 초산의 임산부가 아니고 경산이며, 그것도 넷째 출산이다. 그것을 간과했다. 설마 더 빠르게 진행되는 건 아니겠지, 남편이 올 때까지는 버텨주겠지.. 기다려야 해 낮에 그만 나와주기를 소원했던 나의 마음이 이제 조금만 천천히, 기다려 달라고 넷째에게 소원을 했다.


길게 느껴진 한 시간. 야맹증으로 밤 운전 마다하는 그가 온몸에 집중을 하고 도착을 했다. 눈이 퀭하다..

마음이 놓여서일까. 진행이 오히려 더뎌지는 느낌이었다. 큰 아이 5학년.. 그 아이에게 엄마 병원 간다고 쪽지를 남겨두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곤 병원도착 두 시간 만에 넷째를 만났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여섯이 되었다.




아이들 넷과 함께 산후조리를 해야 하니, 산후조리원은 생각도 못했고. 출퇴근 산후도우미 이모님과 4주간 몸조리를 마쳤다. 남편도 1주 정도 휴가를 내고 도움을 줬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내 몸의 회복.

첫째와 둘째의 빠른 독립. 

셋째의... 심리적 붕괴.


조리기간인 한 달이 지나고 오롯이 내가 네 명의 아이들을 케어해야 하는 시간이 오면서 나날이 멘털은 흔들렸다. 불과 며칠 안에 눈물범벅이 되며 힘겨움의 시간을 맞이했다.


밤마다 셋째가 운다.

잠도 자지 않고 운다.

그러면 나도 울고.

넷째는 그것이 자장가인양 잔다.

오히려 넷째를 유모차에 태워 재우고, 셋째를 업어 재웠다.

그리곤 매일 아침 등원시간이 되면 셋째는 다시 운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운다.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고.

어르고 달래 선생님 품에 인계하고 어린이집 차량에 태워 보내고 나면 그나마 그 여섯 시간 동안 어질러진 살림 정리를 하고 잠깐이나마 넷째와 낮잠을 자며 간신히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등원한 어린이집에서 점심 나절 연락이 왔다.

셋째가 친구를 때리고, 자꾸만 물기도 하며 공격을 한다고. 며칠 되었다고.

선생님은 나의 상황을 아시니 안타까움에 셋째를 집중 케어하면서 주의도 주고 나한테 최대한 전하지 않고 돌보려 하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피해 아동의 부모가 참지 않고 있으니 전화를 해달라고 하신다.


해야지.. 당연히 해야지..

그런 일 있었으면 차라리 바로 말씀해주시지..

어린이집 케어로 될 부분이 아니지 않은가.

동생이 생김으로 발생한 불안감과 질투로, 스트레스가 극도로 올라 공격 성향이 나타났던 것일 텐데...

일이 더 커진 것 같은 상황에 속상했다.


나도 어린이집 교사였던 경험상, 이유가 무엇이 되었던지 피해아동에겐 사과를 해야 하고 어머니께도 연락드려 사과를 해야 하는 게 옳다. 전화드려 정말 죄송하다 사과말씀 드리고, 지금 아이의 상황에 대해서 양해도 구하고, 다음날엔 이미 난 상처 부질없는 건 알면서도 연고와 함께 손 편지를 써서 그 아동 편에 전달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셋째는 2주 정도 등원을 멈췄다.

실컷 재웠고, 최대한 스트레스를 줄였다.

책도 많이 읽어주고 그림도 많이 그리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막내는 바운서(흔들의자)가 키웠을지도 모른다.


2주간의 가정보육기간 동안 셋째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 등원을 하기 시작하던 날 오전 두 시간씩만 어린이집에 있게 했다. 처음 어린이집 적응하는 아이들처럼 그 과정을 천천히 해나갔다. 아이도 그 사이 적응이라는 것을 배우고, 동생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집안 일 하느라 동생 곁에 가만히 앉아 놀아주지 못하는걸 딸랑이 흔들어주며 놀아주기도 하고 동생 앞에 동요 부르며 율동도 해주고 말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른들은 머리로 이해하고 몸은 피곤할지언정 그걸 어떻게든 해내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스트레스가 되어 겉으로 표출하며 때론 스스로 머리를 바닥에 박는 등 자해를 하기도 한다. 아동이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반복적인 학습과 서서히 준비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론적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몸소 경험하며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셋째는 오전반만 하다가, 점심까지 먹고 오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오후반까지 어린이집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셋째는 여동생을 둔 오빠로, 많은 어린이집의 동생들을 둔 형님으로 최고반인 네 살 반까지 잘 마무리하고 어린이집을 졸업하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셋째가 온통 시선을 빼앗아가던 그 시간들 속에, 첫째와 둘째는 자신들의 할 일을 잘 해내주었고 막내는 별 탈 없이 아주 건강하게 자라 어느새 돌이 되어 걷고, 엄마를 불렀다.


물론 이것은 나의 오판이 들어가 있다. 아이들에게 각각 그 시간으로 돌려 이야기를 해보면 둘째는 일곱 살 때라 거의 기억이 없다고만 말을 하고, 첫째는 본인도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하면서도 많이 힘들었던 때였다고 되뇌는 걸 보면, 아이들 각자도 혼란스럽고 눈으로 보고 느끼면서 눈치껏 열심히 제할 일 하며 지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어린 시절 다섯 자매 중 넷째로 눈치껏 내 할 일을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아갔듯이 말이다.




그렇게 넷째가 태어남으로 인해 발생되었던 많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 울며 지새우는 밤들이 이어졌던 나날들의 멘털의 붕괴는 넷째가 돌을 넘기며 어느 정도 일단락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정신없이 일 년을 사는 동안 남편은 그저 생계를 위해 열심히 경제활동을 해주었고, 주말이면 쉬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지내던 사람이 동동거리는 나의 삶을 떨어져 지켜보니 안타깝게 바라보는 눈이 생겨 있었던 것 같았다. 주말에 와서는 빨래를 개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기까지 했다. 혼자 사는 자신의 집 살림과 비교 안 되는 나의 집 살림을 눈으로 보고 뭐라도 도와주려 몸을 움직여줬고, 말없이 토닥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아무런 말없이 나에게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주 복잡했던 자신의 속 마음을..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얼굴을 보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아픈가? 뽀얗던 그의 얼굴이 검어진 듯하고.. 뭔가를 말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가 주말부부 2년 차 늦가을즈음이다.


멘털의 붕괴.. 그 말의 끝은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다낭신이라는 유전질환. 신장에 물혹이 계속 생겨나면서 신장의 기능을 소실시키는 질병.

그래도 괜찮은 경우에는 타고난 명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던 그 유전질환.

관리하는 방법은 싱겁게 먹고, 물 많이 마시는 것.. 그것만 하면 된다고 얘기해 줬던 그 질병.


내가 그의 얼굴을 살피며 대화의 물꼬를 트자 그의 입에서는 무서운 말이 튀어나왔다.


"투석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대"


지난 1년간 막내가 태어나고, 힘겨웠던 시간들로부터 이제 조금 숨을 돌리려 하는 순간.

아...

무슨 말이 필요한가.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나았을까.

대체 저 질환은 어떤 병인거지?


그동안 남편은 내게 무엇을 감춘 거야...

그래서 병원을 못 오게 했던 거야?


(반년 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담당의를 만났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그를 두고 보호자 면담을 하게 되면서.

이 질병은 고약하다고.

관리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라고.

다낭신 신장은 그렇게 물혹이 잡히다 점차 기능을 잃어가 현재로선(당시의) 늦출 수 있는 방법 또한 없다고.

가만히 다가오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질병이라고.

선대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그래서 희귀 유전질환이라고...)


멘털의 붕괴는 그에게로 향했고.


그는 원했다.

가족을.

그에게는 나와 아이들이 필요했다.


나도, 아이들에게도 그가 필요하다.


우리 여섯은 모두 서로가 필요하다.


그러함으로

그와 나는 2년간의 주말부부 기간에 마침표를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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