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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룸 Jan 29. 2022

역설의 시대

  자주 가던 커피숍에서 S는 항상 테이크아웃 커피를 주문해 놓고선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던 사람을 보았다. 그것도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한 번씩 찌푸리게 만드는, 아주 큰 목소리로. 주된 통화 내용은, 내가 잘 나갔었는데 그만두고 지금은 쉬고 있다, 새로운 곳에 들어가고 싶지만 조건이 맞는 곳을 찾기 힘들다, 등이었다. 몇 번 접하다 보니 S는 의구심이 일기 시작했다. 정말 통화하고 있는 거야? 혼잣말하는 건 아닐까? 겉으로 보기에는 형님이라는 호칭을 쓰며 가끔씩 네, 네, 하며 저편의 말을 듣고 얘기하는 듯 보였지만, 자주 접할수록 답답한 자신의 마음을 그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서 대상을 설정한 채 혼잣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어졌다.

  언젠가부터 S는 그 커피숍을 가지 않게 되었고, 그 남자를 한동안 보지 못했었는데, 길거리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휴대전화 없이 혼잣말을 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S는 자신의 추측이 들어맞았다고 생각했다. 커피숍에서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여 휴대전화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후로도 S는 그 남자를 종종 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남자도 항상 다니는 곳으로 오고갔다.

 

  그 남자만큼 자주 접하지는 않지만, S가 동네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혼잣말하는 사람에는 두 명이 더 있다. 극단의 홀로족들을 볼 때면 드는 감정은 씁쓸함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채 사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S는 생각한다. 자신 또한 좁은 시각과 사고를 바탕으로 말을 툭툭 내뱉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며 부끄러운 기억들을 쌓아온 적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버스를 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스마트폰이 없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지나쳐 가는 공간은 싹 지워진다. 출발지와 목적지가 있고, 그 사이에는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경우에도 각자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진풍경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바야흐로 역설의 시대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접하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자기만의 관심사에만 빠져들고 몰두하게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눈앞의 이익, 눈앞의 재미에만 풍덩 빠져들고 저 멀리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사회. 지나간 일은 말끔히 잊어버리고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일에만 관심을 갖는 사회. 그리하여 증폭하는 건 단절감과 고독감이다.

 

  도시에는 수천, 수만의 무인도가 뿔뿔이 흩어져 있다. 무인도마다에는 현대사회라는 거센 풍랑을 헤치며 나아가다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들이 각기 자리하고 있다.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 섬들이 놓여 있건만 가까이 다가가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혼자만의 섬에 고립된 채 놓여 있어서는 희망 같은 단어는 사라지고 말리라. 뗏목을 만들어서든 헤엄을 쳐서든 자꾸 접촉을 시도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리라. 서로의 지나온 과거를 주고받고, 앞으로 함께 맞이해야 할 미래를 논하면서.

  S는 생각 속에 잠겨 있다가 문득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흠칫한다. ‘저 사람 오늘도 혼자서 똑같은 길을 오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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