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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늘

by 이룸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삶충동(에로스)과 죽음충동(타나토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강렬한 오르가즘 뒤에 짙은 허무감이 따라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생겨먹은 게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다.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오는 이유는 낙원을 상실해서이다. 사랑만으로 충만한 완벽의 공간, 자궁에서 추방당한 아기는 낙원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을 때까지 낙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아기는 끊임없이 울어대고, 엄마는 아기에게 낙원과 같은 상태를 유지시켜 주기 위해 애쓴다. 엄마의 사랑으로 아기는 이 세상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느끼며 미소를 머금게 된다. 하지만 백 퍼센트 만족은 있을 수 없다. 불만족 상황에 처할 때마다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어쩌면 미소는 에로스적인 면을, 울음은 타나토스적인 면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사랑의 결핍이 많을수록 파괴본능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모에 대한 적개심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화 과정 속에서 억압된 부모에 대한 적개심이 타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적개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애꿎은 사람이 희생되기도 한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적개심에 불타오른다. 하지만 세상은 '용서'를 '강요'한다. 그래서 많은 희생자의 유족들은 그들을 용서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지점에서 물음을 제기한다. 과연 진정한 용서인가, 하고. 설익은 용서보다는 차라리 용서하지 않을 권리도 있지 않은가, 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너무 쉽게 용서하는 건 아닌가, 하고. 피의자가 피해자와 피해자의 유족들 앞에서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를 받은 다음에서야 용서를 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그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문제 제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제대로 된 용서의 길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영화 <밀양>에서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피의자의 마음에서부터 적개심이 사라져야 한다. 피의자의 오늘을 만든 그 적개심을 피의자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개 그 뿌리는 너무도 깊어서, 감옥에 있을 때는 깊이 뉘우치며 새사람이 된 듯 보이다가도 세상에 나와 살다 보면 다시 싹이 돋아나기 시작하게 마련이다. 파괴본능의 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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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정향

출연 : 송혜교, 남지현, 송창의, 기태영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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