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심하고 충실한 F로 살고 있습니다만,
(1)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 외에도 나와 타인의 감정을 세심히 살필 줄 아는 우리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선택의 중심이 되라는 것이다.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 때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라는 것이다.
선택을 할 때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려해, 앞으로의 관계가 헝클어지는 것이 염려되어 내가 아닌 타인 위주로 선택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있다. 원하지 않는 모임에 참석한다든지, A를 하고 싶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B를 선택한다든지 하는 경우이다.
이럴 경우 그 순간의 불편함은 면하겠지만 그리고 그때에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지만 결국 이런 왜곡된 선택들은 사람들 관계에서 나를 더욱 불편하게 하고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 수 있다.
남을 위한 배려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나 나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삶이 퍽 가여워진다는 것이다.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도 안 되는 것이지만 남만을 위하는, 내가 이기심을 당하는 것과 같은 선택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는 언제고 우리가 가둬놓은 상자를 벗어난다. 자신을 우리에게 정확히 드러내기 위해. 언제고 남만을 위한 선택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진심은 갇히면 갇힐수록 더 커지고 강해져 부정적인 방법으로 상자를 뚫고 나오게 된다. 예를 들면, 우울해진다거나 남들에게 까칠해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진심을 잘 다독이고 들어줄 필요가 있다.
(2)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두 가지 계기에서이다.
대학생이던 시절 편도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를 통학했다. 그러다 보니 늘 피곤하고 지쳐있었다. (지금보다는 튼튼했으리라) 그렇기에 여러 모임이나 식사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교우관계도 다져야 했고 모임이나 행사에 자주 빠져 소속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싫었기에, 막차를 타는 한이 있어도 최대한 행사나 모임에 참석하려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문득.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의 진심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나는 피곤한 것이 싫었고 그럴수록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울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참석한 모두와 친해지는 것도 어차피 무리였다. 늘 피곤을 달고 살고 짜증이 늘었으며 돈만 엄청 썼다.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 다가왔다. 계속 울리는 카톡 단톡방 메시지들, 의미 없이 주고받는 의무적인 연락들은 나를 너무 지치고 피곤하게만 만들었다. 그런데도 사람들과 멀어질까 퍽 두려웠다.
그러다가 교양 수업 때 반수를 해서 입학을 한 다른 과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나와 친한 사람 중에 해당 수업을 함께 듣는 사람이 없어 내 옆자리가 비어있었고 언니는 그 자리에 앉아도 되냐 물었다. 그리고 둘 다 그 자리를 원했기에 그 이후 계속 같이 앉게 되었다. 조를 짜야하는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언니와 한 조가 되었고 그렇게 언니는 나의 친구가 되었다.
언니는 나와 같은 학번이었는데 가치관이 매우 뚜렷한 사람이었다. 나처럼 행사나 모임, 원하지 않는 관계들에 끌려 다니기보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주도적으로 어울렸다. 원하지 않는 행사나 모임은 적당히 쳐내며 그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고 있었다. 언니의 다이어리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가득 담겨있었고 바쁘지만 알찬,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언니가 부러웠던 찰나 언니에게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언니는 과 행사나 모임 같은 거 잘 안 나가도 되는 거야? 뭔가 멀어질까 좀 그렇지 않아?”
언니의 답변은 이랬다.
“나는 반수 해서 입학했잖아. 그런 행사들 참석해보기도 했는데 별 거 없었어. 결국 그래도 그 학교를 떠났잖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반수로 1년을 늦게 시작했으니까 남의 눈치 볼 시간이 없어. 어차피 갈 사람 가고 올 사람 오게 되어있어. 내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너무 피곤하고 그 피곤을 감당하지 못해 본모습이 나오면 다 떠나가.”
그 순간 나도 결심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눈치와 나의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내 소중한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고. 그래서 원하지 않는 참여는 과감히 거절하고 나의 상황에 맞게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갔다.
오해하지 말길! 그래도 꼭 참여해야 하는 공식적인 행사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교류, 가끔 친하지 않았던 동기, 선후배들과의 식사 자리 등은 참석했다. (원하지 않는 참석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나를 너무 남들의 표준으로 몰아가지는 않았다. 내게 최소한의 자유는 허락했다. 예를 들면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면 너무 늦지 않게 눈치 보지 않고 퇴장한다든가, 지나치게 낯선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고 친한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든가 하는 등이었다.
핵심은 결정의 주도권을 내가 쥐고 나를 위한 선택들을 했다는 것이다.
(3)
두 번째 계기는 남을 배려하는 것도 지나치면 나를 다치게 하고 서로의 거리를 멀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다.
나는 늘 남을 배려하는 선택들을 하곤 했다. 나는 A를 하고 싶지만 상대방을 위해 B를 선택하는 식으로. 특히 소중한 사람들한테 그랬는데, 그 소중한 사람들이 마음 아파지는 것이 싫어서 차라리 나보다 그들의 취향을 존중한 것이다.
그래도 그 순간에는 행복했다. 사람들이 웃으면 나도 함께 웃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남을 배려하는 모든 순간에 내 마음속에는 무의식적인 불만을 켜켜이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만 힘든 일이 있으면 그런 불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 혼자 앓는 식이었다가 결국 나의 불편한 마음이 상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짜증이 늘고 화를 표현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나의 짜증이 드러났다. 모두가 눈치 채도록. 불편해지도록.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성난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남만을 위한 선택은 배려가 아니라 서서히 마시는 독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4)
모든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고 싶은 대로만 해도 된다거나, 남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를 배려해야 하고 싫은 것도 해야 할 때가 많다.
다만 그러한 선택의 주도권을 내가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매번 끌려 다니는 선택들로, 남만을 위한 선택들로 나를 옥죌 것이 아니라 숨 쉴 구멍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순간에 내 마음을 살펴 결정하고 혹여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할 때에도 내가 나에게 그 상황을 납득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의무적인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방법으로. 너무 극한으로 몰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는 남들과 멀어지는 것, 불편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기에 갈등을 싫어하고 배려하며 살아갈 때가 많다.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상황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결정을 할 때에는 나의 의중을 묻고 나도 배려해야 함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모두와의 불편을 피하기 위한 나를 잃은 맹목적인 선택들은 반드시 더 큰 불편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