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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여우 Oct 06. 2024

미술관에 간 의학자

의학의 눈으로 명화를 해부하다

제목이 '미술관에 간 화학자'를 떠올리게 했다. 특별히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호기심에 펼쳤는데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미술관에 간 의학자


병원 다음으로 미술관을 자주 간다는 저자는 그림을 좋아하는 의사이다. 스탕달 신드롬처럼 그림 앞에서 큰 감명을 받았던 본인의 경험과 함께 명화 속 의학 이야기를 한다. 의학과 미술을 딱히 연결 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림 속 인물이 어떤 병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한 내용이 재미있다. 우리의 전통초상화를 연구해 선조들의 질환을 밝혀낸 피부과 의사도 생각나고. 


그림 속 인물은 어떤 병을 가지고 있는가?

브뤼헬 <맹인을 이끄는 맹인> 1568

브뤼헬의 맹인을 이끄는 맹인이다. 어린 시절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너무나도 사실적인 세부 묘사에서 충격받았던 기억이 난다.

저자는 이 작품을 보며 그들이 시력을 잃은 원인을 한 명 한 명 설명한다. 왼쪽에서 세 번째 각막이 뿌연 사람은 각막백반, 네 번째 흰자위가 뒤집어진 사람은 흑색 백내장이다. 그리고 막 구덩이로 빠지려고 하는 사람은 아예 눈이 움푹 파여 안구가 없다. 사고로 잃었거나, 죄를 지어 벌로 안구가 뽑혔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랜트 우드, <아메리칸 고딕>, 1930년

미국의 지방주의 회화, <아메리칸 고딕>이다. 그림 속 여인의 긴 목과 튀어나온 눈이 갑상샘기능항진증 환자로 보인다고 한다. 


명화 속 의사 이야기

렘브란트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튈프 박사는 대상포진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헤르페스'라는 이름을 붙인 의사라고 한다. 벌레가 피부 위를 기어 다니는 것처럼 바이러스가 퍼져 나간다는 의미에서 기어간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헤르페스'로 지었다. 또한 각기병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 뛰어난 의사였고, 암스테르담에서 늦은 시간에도 약을 살 수 있게 저녁 늦게까지 약국을 운영하며 빈민들에게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던 인간적인 의사였다. 여러 의과대학 도서관에는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모작이 걸려있는데, 훌륭한 예술작품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흐 <의사 펠릭스 레이의 초상>

고흐는 자신의 정신병을 치료해 준 의사 중 단 두 사람, 레이와 가셰의 초상화를 남겼다. 레이는 정신병원에 와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고흐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열정적으로 치료해 준다. 고흐는 감사한 마음으로 초상화를 그려주었고, 훌륭한 의사이지만 그림 보는 안목은 없었던 펠릭스는 이 그림에 실망하여 닭장 우리에 생긴 구멍을 막는 데 썼다고 한다. 이후 레이는 결핵 치료 전문의가 되었고, 프랑스에서 내무부 장관상도 받는다. 그는 그 자체로 실력 있는 좋은 의사였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고흐가 그린 초상화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1890

고흐의 정신병을 치료해 준 또 다른 의사인 가셰 박사이다. 당시는 전공이 명확하게 분류되지 않았지만 가셰 박사가 우울증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보아 그는 정신과 의사였다. 가쉐박사 역시 우울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진료보다는 그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독특한 의사였다. 이 그림은 감사의 뜻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초상화에 대한 고흐의 실험작이었다. 고흐는 사진 같은 초상화가 아니라 모델의 감정과 성격이 드러나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이 초상화는 가셰 박사의 우울한 감정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도 유명했었다.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1890. 오르세 미술관 

유럽여행 중 오르세 미술관에서 봤던 가셰 박사의 초상이다. 사이토 료에이가 구입한 후로 아무도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 작품은 또 다른 가셰 박사의 초상이다. 오르세 미술관 측은 고흐가 처음 그린 그림은 본인이 소장하고 한 장 더 그려서 가셰 박사에서 선물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셰 박사의 아들이 그 그림을 오르세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위작 논란이 있다. 가셰 박사가 고흐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이라는 주장이다. 오르세 미술관은 진품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고, 진실을 밝힐 고흐와 가셰 박사는 없으니 진위 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고흐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적은 부분이 많이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의료과실이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가셰 박사는 고흐의 몸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지 않고 상처를 소독만 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고흐의 복부에 남아 있던 총알이 염증을 일으켰고, 패혈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혹은 계속된 출혈로 인한 출혈성 쇼크였을 수도 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1889

한때 압생트 속 투존이라는 성분이 신경에 영향을 미치고, 인상주의 시대 압생트를 장기간 마신 화가들이 환각을 보게 되고 서서히 중독되어 시신경이 파괴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특히 고흐 그림은 압생트에 중독된 그의 눈에 비친 풍경이라고 한다. 

그에 대해 저자는 실제로 투존의 독성은 얼마 되지 않으며, 압생트에는 미량의 투존이 들어있어 중독될 염려가 없다고 한다. 압생트 인기에 밀린 와인업자들의 로비였다는 설도 있다고. 1997년에는 별 주변에 코로나가 보일 정도가 되려면 182리터 이상의 압생트를 단번에 마셔야 한다는 논문도 발표되었다. 그 정도의 술을 한꺼번에 마실수도 없고, 그렇게 마시면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고 한다. 


대척점에 있는 개념들

플라시보와 노시보 개념처럼 대척점에 있는 개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탕달 신드롬'과 반대되는 '다비드 증후군'이 있다고 한다. 다비드 증후군은 완벽한 창조물에 대한 파괴 충동이다.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하거나 황홀경에 빠지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예술 작품을 보면 참을 수 없는 파괴 욕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관람객 열 명 중 두 명은 파괴 충동을 보였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은 정말로 망치로 다비드 상 발을 내려친 일이 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 <다비드>

2005년 피렌체 여행에서 방문한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미켈란젤로 <다비드>이다. 다비드 상을 빙 둘러 의자가 있고, 그 의자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감상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때려 부수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으니 다비드 증후군은 없었나 보다.


'베르테르 효과'와 대척점에는 '파파게노 효과'가 있다.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파파게노가 요정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유혹을 이겨낸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는 자살에 대한 상세한 언론 보도를 자제함으로 자살을 예방하는 효과를 말한다.


의학에서 찾은 에코

정신과 질환 중 상대방이 말한 내용을 반복해서 말하는 메아리증 '에코라리아(echolalia)', 심장초음파 검사 장비를 '에코카디오그램(echocardiogram)'이라고 한다.


몽골 제국과 페스트

페스트가 유럽에 전염된 경로로 언급된 학설 중 몽골 제국이 있다. 1347년 칭기즈칸의 장남이 세운 킵차크 칸국 기마병이 크림반도 남부 카파를 포위하고 있었을 때이다. 몽골군은 적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중앙아시아에서 페스트로 죽은 시신을 가지고 와 투석기로 성안으로 던져 넣고 철군했다. 카파는 이탈리아 제노바의 무역기지였는데, 제노바 상인들은 몽골군이 철군한 틈에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이때 쥐와 벼룩도 이들과 함께 이동했고 페스트가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것이다. 

이 책 출판연도가 2017년이라 코로나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코로나를 겪은 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전염병에 대한 내용을 관심 있게 읽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비롯해서 의사로서 사명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언급된다. 한참 의료파업 중이라 사실, 그 말이 진심인지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은 훌륭하다. 저자가 그림을 사랑하는 의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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