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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May 22. 2022

단상 15

1.

우리 강아지 키우기로 했잖아. 그 아이가 먹을 거, 지내는데 필요할 거, 데려오기 전에 가져야 할 태도 같은 거, 그때 적었던 다이어리를 아직도 쓴다. 근래엔 일기를 통 못 적었다. 일기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아서 떠오르는 것들을 모조리 담아야 하니까. 엄두를 못 냈지. 네 이름을 쳐다볼 용기가 도무지 안 났다.      


2.

헤어지자는 말은 만나서 해야 한다고 수는 자주 강조했다. 일종의 예의인 거라고. 수에게선 배운 게 많았다. 나보다 고작 한 계절 더 났으면서 충고 같은 걸 곧잘 했다. 당시의 나는 종일 그 애만 생각했기 때문에, 웃는 낯을 편애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든 그 애가 다 옳았다. 그렇게 여기고 살았다. 투정을 부리든, 신경질을 내든, 속이 뻔한 말을 하든, 나는 응. 하고 동조했다. 고장 난 자판기처럼. 뭘 눌러도 물 한 페트를 반사적으로 내뱉는 자판기. 그 애는 내 한결같은 대답에 곧잘 웃었으니 내가 내뱉은 것은 물보단 영양가 있던 셈이다.     


돌이켜보면 그 애를 대하는 내 태도는 일관성이 좀 지나쳤다. 그 애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재미없다는 거였으니. 영원에게 첫사랑이라는 감투는 아무 영양가 없다는 사실을 그 애 덕분에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첫사랑의 정의를 바꿨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 처음이든 중간이든 끝이든 상관없는 용어로. 그 애에게 얽매이기 싫어. 그렇게 해야만 첫사랑 얘기가 오갈 때 좀 살만했다.      


술만 마시면 수가 살던 동네를 찾아갔던 시절도 있었다. 친구를 끌고 그 애와 걸었던 거리를 걷거나 고백했던 곳에 한참 서 있거나 했다. 네가 그만하자고 했던 곳에서 친구를 부둥켜안았던가. 처절하게 울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네가 이곳을 지나칠 적마다 나를 생각한 적이 있을까, 내 이름이 떠오른 적이 있을까, 묻고 싶은 말만 줄을 이을 뿐이다.     


3.

너와 닮은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 휴대폰 보느라 걸음이 느렸지. 그날 네 사람은 거뜬히 지나갈 법한 그 골목에서 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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