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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May 21. 2022

단상 14

1.

만나는 날을 달력에 기록하던 사람이 있었다. 경복궁, 오이도, 옥탑방 고양이, 뷰티 인사이드처럼 종일 손잡고 다닌 곳이나 연극 또는 영화의 제목을 적는 식이었다. 그녀는 월말이 되면 둥그런 글자로 빼곡한 달력을 보면서 좋아라 했다. 원고지 칸에 올려 적어도 결코 둥그런 글씨체를 잃지 않았던 영. 가늘지만 연약하지는 않은 목소리로 몇 없는 취미라며 웃지 말라고 강조했던 영. 보고 있으면 좀 살만해져요, 하며 영은 달력을 가리켰다. 언제? 하고 물으니 영이 있어요, 하고 얼버무린 날이었다.      


영은 속을 잘 비치려 들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던가. 너무 가까워도 데이고, 너무 멀어도 데인다고. 자칫 가슴이 검버섯처럼 상해버린 뒤에는 상한 음식처럼 어쩔 도리가 없게 된다고. 그렇다고 마냥 표현을 안 하는 편은 아니었다. 때때로 콧소리를 내기도 하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풀썩 안기기도 했다. 겪을수록 미지했던 사람. 미지해서 자꾸만 생각나던 사람. 안길 때마다 콧속을 찔렀던 꽃냄새가 선연하다. 가끔 봄이 되면, 그 냄새를 맡으면, 고개를 빙 돌리고는 했다.      


2.

해가 아무리 넘어가도 그 달력만큼은 버리지 않았다는 거, 당신은 알까.     


3.

누군가의 연애 상담을 해줄 때마다 나는 당신을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그 시절에 적었던 다이어리를 펼쳤다. 처음 만난 날, 당신이 생애 처음으로 만든 빼빼로를 선물해준 날, 여행 간 날, 다툰 날, 화해한 날, 생각할 시간을 달라던 날, 그리고...... 당신 이름 옆에는 꼭 눌러쓴 다짐 같은 게 따라다녔다. 실속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무용한 것들.   

  

4.

달력 위 아무런 기념일도 아닌 날에 영아, 하고 적으면 애석한 마음이 못내 가라앉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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