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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May 19. 2022

단상 12

1.

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곱씹었던 날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소개하는 낱말을 지은 사람이므로, 그만큼 막대한 지분을 가졌기 때문에 이름만으로도 내 발걸음을 곧잘 붙잡았다.      


2.

가장 좋아하는 작가 Y는 현이 산 책으로 알게 된 사이다. 지금은 현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지만 분명 그 시작은 현으로부터였다. 현은 내가 소개해준 책방에서 우연히 Y가 쓴 책을 샀고, 그 책의 제목에는 다정이라는 낱말이 들어가기 때문에, 현과 나는 서로에게 제법 다정하게 굴었다. Y 덕분인 셈이었다.


3.

그때, 현이 내게 일련의 사진들을 보냈을 때, 나는 현의 사진을 탐하듯 저장했다. 지나가는 말로 추천했던 책방과 감탄했던 맛집 그리고 옷집의 모습이 그녀가 보낸 메시지에 예외 없이 속해있었다. 현은 사진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기뻐하는 내 모습이 좋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때의 현과 나는 서로에게 쏘아 보낸 마음을 버리는 것 하나 없이 꼼꼼히 주워 담은 거였다.     


나는 Y의 책 면면에 줄을 쳤고, 현은 그 페이지마다 포스트잇을 붙이고는 했다. 당신이 좋아하니까.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현은 말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책 중에서 서로에게 도움 될 만한 것을 선물하기도 했다. 현은 내게 H의 소설을 주었고, 나는 현에게 L의 에세이를 주는 식이었다. 책이 독자의 취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미루어보자면 우리는 취향을 나눈 셈이었다. 더없이 면밀한 방식으로. 그래서인지 우리는 서로에 대해 급속도로 알아갔다.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싫어하는 것으로.      

4.

당신이 좋아하는 과일, 당신이 무쳐주는 시금치, 당신이 끓여주는 계란죽, 당신이 안아주는 품, 당신과 맞잡은 손, 당신과 걷는 거리, 당신이 좋아하는 꽃, 당신에게서 풍기는 살내음, 당신과 잠들었던 침대, 당신의 음성, 당신의 미소, 당신 그리고 당신이 울었던 이유.     


5.

그럴싸한 문장 대신 당신 이름을 적는 날이 더 많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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