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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May 17. 2022

단상 11

1.

다음 달이면 산동네에 들어온 지 일 년이 된다. 가장 가까운 정류장은 이십 분 거리에 있고, 매일 아침 동네 축사로부터 분뇨 냄새가 풍겨오는 곳. 마을 이장이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소통하며 지내는 곳. 동네 어르신들과 마주칠 적마다 자식 자랑을 들어볼 수 있는 곳. 자주 보면 정드는 것처럼 이곳은 도시와는 다른 이미지로, 어쩌면 애틋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실감하는 날이 종종 있었다.      


2.

봄에는 골목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펴고 노란 꿀벌 무리가 쏘다닌다. 여름에는 빨갛게 익은 앵두가 꽃의 흔적을 대체하고, 장마철에 창을 열면 빗방울이 기와지붕과 투닥이는 소리가 들린다. 가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집 앞 유엔 어르신네 돌감나무에는 노란 과실이 달리고, 그늘진 아랫면에는 빗방울처럼 쏟아진 통꽃과 과실이 모여 샛노란 그림을 그린다. 맑은 날 돌감나무 아래의 풍경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겨울도 빼먹을 수 없다. 개나리와 진달래, 앵두를 지나 돌감의 자리까지 모두 하얀 눈이 차지하여 온 동네가 환해진다. 돌이켜보면 사계절의 모습이 이토록 다채로울 수가 없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이곳에서 제법 많이 느꼈다.     


3.

동네 이웃 어른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 오기도 했다. 텃밭 작물들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조악하게나마 짠 평상을 두고 동네에 쉬어갈 곳이 생겼다는 투의 언질을 몇 마디 주고받기도 했다. 공장에 다니는 베트남 출신의 사람들과는 출퇴근길에 인사를 나누는 사이도 되었다.(지금껏 김치도 나누고 밭일도 나눴다.) 이것이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무언가라고 나는 여긴다. 삶의 구역이 적확히 구획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공유하며 생을 보내는 곳. 그곳이 내가 사는 곳이다.     


4.

텅 빈 하늘 밑 불빛들 켜져 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      


이문세 옛사랑의 가사에서처럼 나는 별들이 불을 켤 때 여태껏 품었던 이름들을 소리 내어 본 적이 있다. 이곳의 하늘은 유난히도 밤에 눈길이 간다. 별들은 속속 모여 훤히 비춰대고, 나는 그 별들을 한데 모아 어떤 이름을 짓느라 눈을 붙잡히게 되는 일이 빈번했다. 글자를 따라 발음하다 목청이 높아지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흰 눈 내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어떤 날에는 그 여름에 먹여줬던 앵두를, 그림처럼 빤히 쳐다봤던 노란 통꽃과 돌감을, 발자국에 발바닥을 맞춰보던 그때를 곱씹어보기도 하였다. 그 이름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한참 걸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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