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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May 15. 2022

단상 9

1.

나는 관념 속에서 살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어떤 단어를 섭취하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화했으므로, 적어도 지금까지의 나는 그래 왔으므로 앞선 문장은 다소 설득력을 얻는다. 누군가에게 최근의 나를 소개해야 한다면 장마*, 분노 사회**, 의심의 역사*** 같은 표제들이 몸의 한구석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 담긴 단어가 시선을 비집고 들어와 의식의 한 가닥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도서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교육, 타인과의 대화 등 일생을 둘러싼 언어에 의해 나는 꾸준히 대체되었다.     


2.

엠비티아이 세 번째 특성이 F인 이상, 나를 가장 빈번하게 변화시킨 것이 있다면 단연코 감정이었다. 그중에서도 사랑. 나는 그것을 거듭해도 미지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미워하고 상처받고 혹은 못질의 주체가 되는 것을 경험했더라도 다음 연애에서 격정의 당사자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겪고 배우고 깨닫고 다시 겪는 과정에서 새롭게 연출된 상황을 마주하는 순간이면 단번에 얼어붙고는 했다. 심리 상담사가 자신의 심리를 완전하게 제어할 수는 없는 것처럼.     


3.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라는 진부한 문장을 적게 만드는 것도 번번이 사랑이었다. 이제는 관념으로만 만날 수 있는 이름, 같이 걸었던 제주의 냄새, 침묵을 채웠던 파도 소리, 그늘진 것처럼 새카맸던 현무암. 그들이 총체적으로 어울려 꿈에서 재현된 날도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떴을 때 익숙하지만 낯선 천장을 보았고, 그 위에 적혀있던 이름이 지워질 때까지 누워있어야 했다. 오래도록 보고 싶으면 손을 세로로 치켜들고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 적으면 되었다.     


4.

장마의 한복판에서 기어코 탑승했던 제주행 비행기를, 서로에게 분노를 표출하며 다퉜던 이유를, 비로소 의심을 풀고 끌어안았던 날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다고, 서로를 열렬하게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오늘날의 나는 적을  있다. 관념으로라도 당신에게 전할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것이다.      


5.

아직 적지 못한 문장이 많다.        

   

* <장마>, 윤흥길

** <분노 사회>, 정지우

*** <의심의 역사>, 제니퍼 마이클 헥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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