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시간 덕에 어른이 되어 간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것보다 나와 잘 지내는 게 중요하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혼자, 마음의 방에 머물 때에만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있다. 구겨진 마음을 펴고, 슬픔을 처리하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내 삶의 가치를 제고하고, 의미를 묻고, 또 내면을 견고하게 구축하는 일.
.....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혼자 있어볼 것. 삶의 진실은 거기 있으니 말이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것보다 나와 잘 지내는 게 중요하다. <혼자 있기 좋은 방, 우지현>
화가 날 때면 어떤 말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달래주는 상대를 나무라거나 철통같이 단단하게 입술을 다물어 버렸다. 내 마음은 오직 나만이 풀 수 있어란 마음으로 걸었던 길은 얼마나 멀고 길었을까. 걷고 또 걷다 마음속 응어리들이 차츰 힘을 잃어 갈 때 비로소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뛰쳐나갔을 때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 나는 상대가 묻는 말에 새침한 표정으로 응했지만, 마음은 이미 동그레 져 있었다. 그렇게 홀로 머무는 시간의 귀함을 배웠다.
우리 집 방이 두 개가 되었던 건 고등학교 때였다. 중2병이라는 무서운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무렵도 그때였다. 고집을 부려도 네 살 터울 막내 언니의 몇 마디 말이면 금방 겁을 먹었던 나는 점점 더 커지고 커져서, 언니와 함께 얼마든지 맞짱을 뜨겠다는 의지로 불타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미 취직해 사회인이 되었던 언니가 늦은 밤 퇴근길에 빈손으로 온 날은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 왜 오늘은 빈손이야? 나 언니만 기다렸는데!" "야 오늘 너무 늦게 끝나고 뭐 사 올 시간도 없었어." 이해가 되는 마음은 뭐든 먹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별 것 아닌 일로 짜증을 내면, 피곤한 언니의 분노가 터졌고 싸움으로 번지곤 했는데, 언젠가 다른 문제로 다퉜을 땐 언니를 이겨보겠다는 마음으로 육탄전에 뛰어들었다. 언니는 나를 밀치며 때렸고 나는 그 손을 잡아 있는 힘껏 막아섰다. 결국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난투극이 벌어졌고. 상대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빼내고 나서야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씩씩 거리며 멈춰 섰다.
그날 언니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대항해 온 나에게 놀랐고, 배신감을 느꼈고, 달라진 동생이 낯설었을 테다. 힘으로 맞선 나는 더 이상 맞고 쭈그려 우는 어린아이가 아니며, 언제든 부당한 대우에는 그리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나를 느꼈을 거다. 이후로 우리의 감정이 날이 설 때마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걷는 동안 나는 늘 혼자였고, 그럴 때면 내가 잘 보였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그래서 어쩌고 싶은지를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들. 있었던 일들을 되감기 해보며 잘한 일과 못한 일을 따져본다. 괴로움이 클 때면 이 길로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릴까? 아니면 이 세상과 완전히 멀어지는 길로 가버릴까. 나를 지우면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거란 어리석은 생각으로 거칠게 걷기도 했었다. 그러나 홀로 걷는 시간이 나를 다독였다. 더 좋은 생각을 하려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 없이. 혼자 걷는 있는 시간이 충분해지면, 다시 나를, 그리고 삶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찾아와 줬다.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하기만 했던 어린아이는 그 시간 덕분에 어른이 되었다. 온전히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퇴근 후 텅 빈 집안의 고요함과 고소한 커피 향과 식탁에 놓인 다정한 책 한 권이 마냥 좋은 나이가 되었다. 이 보다 더 나를 키워주는 시간은 없다.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멍 때리는 일이 이렇게 좋아질지는 나도 몰랐다. 혼자 있는 시간은 치유이고, 행복이고, 대화이고 그리고 삶이다.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지기까지 그렇지 못한 숱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고통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이어령 선생님의 말씀처럼, 사람 가득한 혼잡한 도시 속에서 지쳐봤던 사람이 고요한 시골길의 한적함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테니까.